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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칼럼/9.26]‘문명대국’ 중국, ‘위험한 나라’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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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7,076회 작성일 2012-09-26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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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조선시대 창덕궁 안에는 ‘대보단(大報壇)’이라는 제단이 있었다. 대보단은 ‘명나라가 조선에 베푼 큰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제단’이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 등의 신위가 모셔져 있었다. 제사는 매년 3월 조선 임금이 직접 지냈다. 흥미로운 것은 대보단이 건립된 시점이다.



명나라가 청나라에 멸망한 것이 1644년이다. 대보단은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1704년에 세워졌다. 청나라의 기세가 등등하던 때 조선 왕조는 태연하게 명나라를 기리는 제단을 궁궐 안에 지어 놓고, 사라진 명나라를 향해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대보단은 1920년대까지 남아 있다가 1927년 일제가 그 자리에 신선원전을 건립하면서 사라졌다.



홍대용과 엄성, 추사와 옹방강







외교적 관점에서 보면 대보단은 무모한 자해 행위다. 흔히 우리 선조들이 힘에 굴복해 중국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대주의를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대보단의 사례는 사대주의 논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진정 힘을 추종하는 사대주의자들이라면 대보단처럼 청나라에 맞서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조선 사회에 만주족 출신이 세운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정서가 강했다고는 해도 명나라를 대한 조선의 의리(義理)에는 다른 요소들이 작용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중국이 대대로 지켜온 도덕적 문화적 전통, 주변 국가에 대한 포용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동양과 서양이 지리적, 정치적으로 완전히 분리돼 있던 시절이었다. 중국이 강한 군사력 이외에 앞선 문화와 문명을 갖고 있었기에 주변국들은 중국을 구심점으로 인정했고, 그 결과 동아시아의 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다. 창덕궁의 대보단에는 청나라 정권의 등장으로 위기에 놓인 문화적 전통에 대한 우려, 조선이 앞장서서 그런 전통을 이어간다는 자부심이 들어 있었다.



조선 지식인들은 문명대국 중국을 좋아했고 선망했다. 실학자 홍대용은 1766년 북경의 유리창을 찾는다. 유리창은 서울의 인사동 같은 곳으로 책 벼루 붓 등을 파는 거리다. 호기심에 이곳저곳 둘러보던 홍대용은 우연히 안경을 쓰고 있는 중국인을 만난다. 홍대용 일행은 “그 안경이 마음에 드는데 혹시 팔 생각이 없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그 중국인은 “하필이면 팔라는 말씀을 하십니까”라며 그 자리에서 안경을 벗어 건네준 뒤 홍대용 일행이 사례를 하겠다고 해도 손을 내저으며 사라졌다. 그는 항주에 사는 선비 엄성이었다. 홍대용 일행은 수소문 끝에 엄성의 숙소를 찾아 각별한 우정을 나눈다.



조선이 배출한 천재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와 중국의 노(老)학자 옹방강과의 만남도 감동적이다. 1810년 북경을 방문한 김정희의 나이는 24세에 불과했다. 멀리 조선에서 젊은 천재가 왔다는 소식을 접한 77세의 옹방강은 나이 어린 김정희를 초대해 필담을 나눈다. 이들의 교류는 추사가 귀국한 뒤에도 이어졌다. 낯선 이방인에 대한 배려, 재능을 알아보는 식견, 인연을 중시하는 포용력 등 중국인의 긍정적인 모습은 당시 조선 사회에 널리 회자됐다.



‘위험한 중국’에 깊어지는 고뇌



중국은 2009년 7월 워싱턴에서 미국과 마주 앉은 ‘전략과 경제 대화’를 계기로 세계 G2로 공인받았다. 미중 두 나라가 전 세계의 안보와 경제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미중 관계가 21세기를 만들어갈 것”이라는 말로 중국의 G2 등극을 축하했다. 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한 뒤 끝없이 추락했던 중국이 거의 170년 만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3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이전의 일은 접어두더라도 중국은 G2 등극 이후 우리에게 주로 나쁜 인상으로 각인되고 있다. 2010년 중국 당국의 인터넷 검열에 시달리던 구글이 중국에서 사업을 철수했다. 같은 해 중국의 반체제 인사인 류샤오보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자 중국은 “가당치 않은 일”이라며 과민 반응을 보였다. 2011년에는 우리 민족의 노래인 ‘아리랑’을 조선족 것이라며 중국의 문화유산으로 올렸다. ‘동북공정’에 이어 청나라 역사를 정리해 올해 완료되는 ‘청사(淸史)공정’에도 한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기술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대국의 옛 얼굴은 찾을 수 없고 편협함만 가득하다.



지난해 12월에는 중국 선원이 서해 불법 조업 중에 우리 해경을 살해하는 사건이, 올해에는 중국 당국이 북한인권운동가 김영환 씨를 고문하는 일이 발생했다. 일본 필리핀 베트남과의 영토 분쟁에서 중국은 무력 동원을 불사하고 있다. 이제 힘이 생겼으니 과거에 당했던 역사적 굴욕을 되갚겠다는 의도도 드러낸다.



동아시아의 격변기를 맞아 중국은 ‘위험한 나라’ ‘예측할 수 없는 나라’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18, 19세기 엄성 옹방강 같은 멋진 중국인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문명대국이 아닌 중국을 곁에 두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뇌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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