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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칼럼/9.12] 누구를 위한 ‘역사 內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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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7,321회 작성일 2012-09-1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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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지난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유신 40년 특별전’을 관람했다.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선포한 때가 1972년 10월이므로 다음 달로 40년이 된다. 전시회를 주관한 단체는 좌파 진영의 민족문제연구소다. 내용은 부실하고 초라했다. 유신 시절의 포스터 책 신문 사진 등을 일부 모아놓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시회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야권, 대선 노리고 정략적 공세



주최 측은 유신에 대해 ‘일제의 국가주의와 총동원체제 이데올로기를 차용(借用)한 식민의 유산’이라고 규정했다. 전시물들은 박정희 정권이 일본과 유착돼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의 업적으로 꼽히는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도 일제강점기의 농촌진흥운동을 모방했다고 깎아내렸다. 전시장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끝나지 않은 유신’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을 친일 세력으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이 전시회를 마련한 민족문제연구소를 포함한 4개 역사 관련 단체들은 14, 15일 ‘역사가, 유신시대를 평하다’라는 제목으로 학술대회를 연다. 학술대회에 앞서 배포한 발제문을 보면 ‘유신 체제가 1997년 외환위기를 불렀다’고 주장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주최 측은 유신을 재조명한다는 취지를 내세우지만 연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박정희 대통령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행사가 될 듯하다.



최근 좌파 진영이 집중적으로 제기했던 역사적 이슈가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다. 장 선생의 묘를 이장하면서 고인의 두개골에서 골절 흔적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야권은 재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장 선생이 1975년 등산 도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화세력이 정권을 잡았던 시절인 2002년과 2004년에 ‘타살’을 전제로 샅샅이 조사를 벌였음에도 사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이번에 유골을 검안한 이윤성 서울대 의대 교수는 “장 선생이 절벽에서 추락하면서 머리 부분에 둔체에 의한 손상이 이뤄진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누군가가 망치로 내리쳐서 생긴 것인지, 아니면 추락하면서 바위 등에 부딪혀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2004년 조사 때의 결론인 ‘진상 규명 불능’에서 달라진 것이 없다.



박정희 정권을 둘러싼 역사적 이슈들이 다시 꼬리를 물고 있다. 박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겨냥해 부정적 이미지를 확산시키기 위한 움직임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에 맞서 박 후보는 ‘5·16은 불가피한 선택’ ‘유신의 평가는 역사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논리로 대응해 왔다. 그제 박 후보가 방송 인터뷰에서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의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면서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한 뒤 또 한번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박근혜 인혁당 인식 부적절 했다



박 후보가 언급한 ‘두 가지 판결’이란 1975년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기소된 8명에게 사형을 언도한 판결과, 2007년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재심 판결을 의미한다. 그러나 박 후보는 다른 대답을 했어야 했다.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은 대법원이 사형을 언도한 바로 다음 날 이뤄졌다. 사법부가 독재 권력에 예속돼 있던 시기였다. 너무 성급한 단죄였다. 시간을 주고 전향을 유도할 수도 있었다. 2007년 재심에서 재판부는 “수사 과정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박 후보가 두 판결에 대해 중립적 태도를 취할 게 아니라 “유신 시절 경직된 수사 및 재판 체제에서 비롯된 비극”이라고 무겁게 받아들였다면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을 것이다. 박 후보가 대통령 후보에 오른 것은 한국 경제를 일으킨 박 대통령의 긍정적 유산에 힘입은 바 크다. 박 후보는 아버지의 어두운 유산도 함께 떠안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역사적 진실은 시간이 흐르면서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1975년 인혁당 사건 이전에 1964년 적발됐던 1차 인혁당 사건에 대해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47년이 경과한 지난해 “일부 세력의 주장처럼 정부의 용공 조작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공산혁명 사건”이라고 증언했다. 박범진 전 국회의원은 2010년 “나 자신이 1960년대 초 인혁당에 입당해 활동했으며 인혁당은 정부의 조작이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박정희 정권에 탄압당한 장준하 선생이 5·16을 지지한 적이 있으며 기본 이념은 반공이었다는 증언도 나온다. 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도 어떤 새로운 증언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점에서 사람들은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한다.



대선이 다가올수록 야권이 촉발한 ‘역사 내전(內戰)’은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는 선거에서 이득을 보려는 정략이 내재돼 있다.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을 찾는 일은 바람직하지만 역사의 한쪽 측면만을 앞세우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때아닌 역사 이슈의 홍수 속에서 유권자들의 냉철한 눈과 지혜가 절실하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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