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 리콴유가 덩샤오핑에게 가르쳐준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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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7,492회 작성일 2015-04-01 09:25본문
리콴유의 ‘종교’ 실용주의… 덩샤오핑과 통했다
중국 높이고 싱가포르 낮추는 겸손함으로 설득력 발휘
경제적 다양성과 일당독재 병행… 싱가포르가 중국에 수출
1차 세계대전 후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프랑스는 인구대국 중국의 값싼 노동력을 수입했다. 그러나 중국은 막노동자보다는 낙후한 나라를 발전시킬 인재를 프랑스에 보내고 싶어했다. 양국의 이해를 절충한 것이 노동과 공부를 결합한 근공검학(勤工儉學) 프로젝트였다. 덩샤오핑도 충칭예비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1920년 근공검학 장도에 올랐다. 덩은 앙드레 르퐁호 화물칸에 몸을 싣고 상하이를 떠나 홍콩 사이공 싱가포르를 거쳐 마르세유로 갔다.
파리의 르노자동차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덩은 ‘자본주의 앞잡이들과 십장들의 굴욕적인 대우’를 받으며 공산주의 이론을 흡수했다. 근공검학 유학생 1500명 가운데 20명 이상이 공산당의 탁월한 지도자로 성장했다. 프랑스 자본가들이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양성한 것이다.
1978년 마오쩌둥의 사인방(四人幇)을 제거하고 재기한 덩은 동남아시아 3개국을 순방하면서 58년 만에 싱가포르를 찾았다. 프랑스로 가는 길에 이틀간 들렀던 싱가포르는 초라한 어항이었다. 반세기 만에 이룬 싱가포르의 상전벽해(桑田碧海)에 덩이 찬사를 보내자 리콴유는 “인구 250만 명의 소국(小國)”이라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덩은 이 말에 용기를 얻은 듯 “만일 상하이만을 갖고 있었다면 나 역시 상하이를 싱가포르처럼 빨리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중국 전체를 갖고 있지요”라고 말했다. 덩은 나중에 싱가포르 같은 연안 도시를 먼저 발전시켜서 중국 내륙으로 진격시키는 경제특구 전략을 도입했다.
리콴유는 덩에게 싱가포르인들은 대부분 중국 남부의 광둥 성과 푸젠 성 출신의 문맹(文盲)에 빈농(貧農)의 후예라고 설명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민을 떠나고 농토가 많고 교육을 받은 학자와 관리 문인은 중국에 남아 자손을 길렀다. 리콴유는 우수한 사람들의 후손이 남아 있으니 중국이라면 싱가포르가 한 일을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싱가포르를 낮추고 중국 본토인들을 치켜세우면서 조언하는 어법이 덩에게 설득력을 발휘한 것 같다.
리콴유는 자서전 ‘일류 국가의 길’에서 ‘덩은 5척의 단신이지만 내가 만난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큰 거인이었다’고 평가했다. 74세에도 불편한 진실에 직면하면 기꺼이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리콴유의 유일한 종교는 실용주의였고 이 점에서도 덩과 통했다. 덩이 1978년 싱가포르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은 중국인들이 성취해야 할 지표가 됐다. 언론 통제와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억압, 경제적 다양성을 병행하면서도 일당독재를 유지하는 싱가포르의 체제가 덩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덩은 1992년 중국 남부를 순회하면서 “우리는 싱가포르의 경험으로부터 배워 그들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덩의 남순강화(南巡講話) 이후 비공식 대표단이 수백 명씩 무리를 지어 싱가포르에 현장 공부를 하러 갔다. 리콴유가 1988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덩은 “중국은 당신과 심지어 한국에까지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리콴유의 매춘, 도박, 마약중독에 관한 정책도 실용주의적이다. 그는 싱가포르를 찾은 중국대표단(단장 쉬웨이청)에게 “매춘, 도박, 마약중독과 같은 악습을 통제할 수는 있지만 근절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국제항구인 싱가포르는 매춘을 특정 지역에 한정시킨 후 윤락여성들에게 정기검진을 실시했다. 도박을 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털어 놓았다. 중국인 이민자들이 어디에 정착하든지 늘 따라다니는 중독현상이었다.
중국도 개혁개방과 함께 경제특구의 매춘, 음란물, 마약, 도박, 범죄로 골치를 앓았다. 공산당 내에서도 이념을 수호하려는 쪽은 이 같은 사회적 오염을 이유로 개혁개방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덩은 “창문을 열면 신선한 공기와 함께 파리 모기가 함께 들어오기 마련이지만 이런 것들은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결국 ‘근절보다는 통제’라는 리콴유의 방식을 따른 것이다. 리콴유 방식은 성매매금지법이나 김영란법으로 논란이 일고 있는 우리로서도 참고할 바가 있다.
폭우가 쏟아지는 속에서도 싱가포르인들은 마지막 길을 떠나는 고인을 애도했다. 상하이 인구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도시국가에서 치러진 거인(巨人)의 장례식에 세계의 지도자들이 줄을 지어 참석했다. 싱가포르의 기적을 만든 리콴유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실용주의자로 기억될 것이다.
황호택 논설주간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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