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준영 칼럼/10.5] ‘한글 세계화’ 구호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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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7,076회 작성일 2011-10-10 10:51본문
프랑스 시라크재단 사업방식 참고할 만
근자에 ‘한글 세계화’를 말하는 이가 늘어간다. 말은 있으나 문자가 없는 지구촌의 여러 부족·종족·민족에게 한글을 표기수단으로 제공하자는 사업이다. 최근 인도네시아 찌아찌아 부족이나 볼리비아 아이마라족에게 펼쳐지고 있는 한글 보급 운동이 대표적인 보기라고 할 수 있다. 배우기 쉬울 뿐 아니라 다양한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의 우수성을 아는 이들이라면, 이런 운동의 의미와 가능성에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루어진 성과나 향후의 사업방향을 놓고 ‘한글세계화’의 기치를 내세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차준영 대기자 |
왜 그런가? 첫째로, ‘한글세계화’란 현지 언어와 문화의 보존 또는 문맹퇴치 사업의 본질적 의미를 왜곡시킬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선진 강대국 중심으로 국제질서를 논의하는 곳마다 세계화 반대시위가 끊이지 않는다. 세계화를 ‘양의 탈을 쓴 제국주의’쯤으로 생각하는 이가 많은 실정이다. 아무리 순수한 뜻으로 ‘한글 세계화’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해도 자칫하면 당사국 국민이나 주변 국가로부터 ‘문화침략’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과 반발을 자초할 수 있다.
미국이나 중국, 일본에서 ‘영어 알파벳의 세계화’, ‘간자체(簡字體)의 세계화’, ‘가나(假名)의 세계화’를 표방하는 운동이 일어난다면,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과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를 선뜻 공감하고 호응할 수 있겠는가. 대답은 자명하다. ‘한글 세계화’란 구호는 ‘국내용’으론 어떨지 몰라도 지구촌시대 안팎의 호응을 얻기에는 부적절한 용어이다.
둘째, 언어 보존사업이나 문맹퇴치 운동은 본질상 외부의 공급자 위주로 추진될 수 없다. 철저히 현지인의 필요와 현지 언어·문화의 토양을 본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한글 보급이 보편적 인류애를 실천하는 사업으로 승화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문맹률이 높은 오지의 부족·종족에게 문자생활의 길을 터주고 사멸 위기에 몰린 언어와 문화적 다양성을 보존하려는 교육 문화사업의 성격이다. 국가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셋째, 문자 표기를 위해서는, 그 언어의 음운, 형태와 통사론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충분한 언어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표기방법의 체계를 세우고 교육까지 이어져야 하는 장기적인 사업이다. 그 나라 정부로부터 양해를 얻고 정책적 지원을 확보하는 것도 큰 숙제이다. 최소한 10∼20년을 내다보며 현지 언어 전문가를 양성하고, 교사를 양성하며, 각종 교재와 교육도구까지 개발해야 한다. 당연히 교육 경제 등 종합적인 지원책이 요청된다.
이런 사업은 개인이나 시민단체만의 힘으로는 어렵다. 사회적 성원은 물론 국가적·국제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정부가 전면에 나서는 것도 부적절하다. 이 점에서 프랑스의 시라크 재단(Foundation Chirac)의 사례를 눈여겨볼 만하다. 2008년 출범한 시라크 재단은 문화적 다양성 보존 활동과 함께 환경보호, 보건 등의 사업을 벌이고 있다. 특히 폴리네시아 바누아투 섬의 ‘아라키어’ 보존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등 사멸 위기에 처한 언어·문화 살리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유엔과 유네스코 등에서 소수언어 보존방안을 논의하자며 국제회의 개최를 제안한 바 있다. 민간 후원금과 아프리카 개발은행 기금을 바탕으로 서아프리카에 물과 의약품 공급에 나서기도 한다. 소수언어 보존만이 아니라 종합적인 평화운동을 펴고 있다.
특정 종족이나 부족이 자치권을 갖고 있다고 해도 영어나 불어, 아랍어 등 공용어를 가진 나라 안에서 표기수단으로서의 한글을 채택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결정이 아니다. 관습이나 법 제도상의 장애요인을 넘고, 언어와 문화의 보존, 문맹퇴치를 위한 방안으로서 공감을 얻어야 한다. 현지 공용어와의 연결고리로서 소통이 용이한 언어학적, 기술적 토대에까지 관심을 기울일 필요도 있다. 한글보급은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를 염두에 두고 추진해야 할 사업인 것이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의 정신은 오늘날 지구촌의 문맹퇴치 운동과도 맥이 통한다. 한글은 정보화가 용이한 만큼 지구촌의 정보격차 해소와 같은 원대한 공익사업에도 기여할 세계적 자산이다. 한국인, 한국기업과 민간단체들이 여기에 함께 손잡고 나설 수 있다면, 얼마나 뜻있는 일이겠는가. 한글! 한국인에게는 큰 ‘축복’이자 ‘소명’이 아닐 수 없다.
차준영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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