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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칼럼/1.4] 다시 읽는 성철 스님의 서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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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0,147회 작성일 2012-01-04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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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수석논설위원



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스님을 물어봤더니 성철 스님(1912∼1993)이 맨 위였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도 유명한 성철 스님은 현대 불교에서 손꼽히는 선승(禪僧)이다. 30년 동안 고독한 수행을 마친 그는 53세 때인 1965년 9월 2일 경북 문경의 김용사에서 대중을 상대로 첫 설법을 한다.



‘어떤 일에도 간여하지 않는다’



그 전까지 성철 스님은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를 8년 동안 했다. 암자 주변에 철조망을 둘러치고 외부인의 접근을 막은 뒤 잠을 잘 때도 눕지 않는 수행이었다. 그는 1964년 바깥세상으로 나와 서울 도선사에서 청담 스님(1902∼1971)과 조우한다. 청담 스님은 위기에 놓인 한국 불교를 중흥시킨 주역이다. 광복 직후 국내 불교 신도는 50만 명에 불과했고, 불교를 바라보는 일반인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청담 스님은 불교 정화운동의 선봉에 섰다.



두 ‘큰스님’의 역사적 만남은 서원문(誓願文) 작성으로 이어졌다. 출가자로서 행동지침을 글로 적어 꼭 지켜 나가기로 다짐한 것이다. ‘옛 큰스님들의 유법(遺法·남긴 법)을 실천하고, 일체의 공직과 집회, 회의에 참여하지 않으며, 어떤 일에도 발언이나 간여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약속대로 성철 스님은 평생 정치 문제, 사회 문제에 대해 철저히 거리를 뒀다. 이 다짐은 그동안 한국 불교에서 중요한 원칙이 됐다.



이명박 정부 들어 국내 종교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개신교 장로인 대통령이 취임한 뒤 정부 정책이 특정 종교에 편향됐다는 시비가 벌어지고, 전에 볼 수 없던 종교 간 갈등이 불거졌다. 사회 세력들이 서로 극한 대립을 하면서 종교의 정치 개입 논란도 증폭됐다. 총선과 대통령선거가 치러질 새해에는 종교계가 또 한 번 정치적인 회오리에 휘말릴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개신교계는 지난해 말 서울시의회를 통과한 서울학생인권조례를 놓고 불교계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초중고교생의 집회 자유 보장, 두발 복장 자유화 등을 담고 있어 시행될 경우 학교 교육의 근간이 바뀌게 된다. 이른바 진보 세력은 서울 시민 9만7000여 명의 서명을 얻어 주민 발의 형식으로 조례안을 서울시의회에 올렸다. 주민 발의가 이뤄지려면 서울시 유권자의 1%인 8만2000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부 불교 단체가 나서 적극적인 서명운동을 벌여 주민 발의를 성사시켰다고 개신교계는 보고 있다. 이 단체들은 조례 가운데 ‘특정 종교 및 종교과목 강요 금지’ 조항을 지지했다.
종교계 ‘선거 중립 선언’ 왜 못하나



개신교계의 한 인사는 “종교계가 설립한 사립학교 가운데 개신교가 세운 사학이 80%를 차지한다”면서 “일부 불교 단체가 개신교 사학에 제동을 걸려는 의도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개신교계는 조례 제정에 반대하는 ‘맞불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어 갈등의 불씨는 현재 진행형이다. 대표적인 두 종교가 정치와 이념 갈등에 휘말린 형국이다.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올해 총선과 대선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의 정책을 직접 검증하고 후보자의 선별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위원회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제주 해군기지, 4대강 사업, 원자력발전소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해왔다. 좌파 진영의 노선과 정확히 일치한다. 시민단체들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천주교가 검증에 나서야 하는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들의 검증이 특정 정당,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나 반대로 연결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개신교계 일부는 아예 정치세력으로 변신했다. 기독교정당인 한국기독당과 기독자유민주당이 올해 선거를 겨냥해 출범했다. 실제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얼마나 얻어 낼지 알 수 없지만 여러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해온 한국 사회에서 특정 종교가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하겠다며 직접 정치에 뛰어드는 방식은 거부감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본격적인 선거 국면으로 접어들면 목사 스님 신부 등 성직자들이 설교나 설법 중에 특정 후보를 거론하고 지지를 호소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은 한국 종교의 위상과 신뢰도를 더 추락시킬 것이다.



성철 스님은 섣부른 사회 참여보다는 불교의 본질적 역할에 먼저 충실해야 한다는 뜻에서 서원문을 썼다. 성철 스님의 제자인 원택 스님은 “종교가 스스로 영향력을 갖춰야지, 현실에 들어가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게 성철 스님의 생각이셨다”고 전한다. 마침 올해는 성철 스님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로 4월 6일 탄신을 전후해 여러 기념사업이 준비되고 있다. 각 종교를 초월해 성직자들이 그의 서원문을 되새겨 봤으면 싶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 등이 올해 양대 선거에서 중립을 지키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도 현실적 방안이 될 수 있겠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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