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형 칼럼/12.30] 자식세대의 신분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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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1,337회 작성일 2011-12-30 11:21본문
굴지의 대학총장과 대화하다가 \"현재 가장 떠오르는 신(新)권력자가 누구인지 아느냐?\"는 물음에 적이 당황한 적이 있다. 결코 맞힐 수 없는 이런 종류의 수수께끼에 총장은 \"희화(戱畵)권력\"이라며 또 한 번 뒤통수를 쳤다. 세수도 안하고 이발도 하지 않는 부스스한 꼴을 하고 있지도 않은 사실을 꾸며내 비비 꼬면서 스스로를 잡배라고 칭하는 무리와 그 일단이다.
정치의 시즌에 갑자기 시선을 모으는 강남좌파 교수, 청춘콘서트의 스타더러 국회의원 출마 의향을 넌지시 물으면 \"날 뭘로 보느냐\"고 모욕을 당한 사람처럼 반응한다고 한다. 금배지보다 훨씬 높은 곳에 사는 초(超)권력자들이다.
인간 군상의 변화상을 정통적으로 묵직하게 알려주는 계기판은 그래도 통계청이 2년마다 내놓는 사회조사통계다.
이 조사에서 꺼림칙한 부분은 자식세대의 신분 상승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일찌기 한국 발전사에서 보지 못한 퇴행적 사고다. 본인의 신분 상승이 어렵다는 실망감은 그렇다고 치고 자식세대가 잘될 것이란 기대감이 41.7%로 2년 만에 7% 가까이 줄었다니….
문득 어떤 장관이 자기 집 가정부와 애들 문제 때문에 신경전을 벌였다는 기억이 떠오른다. 얘기인즉 장관의 아들과 가정부의 아들 중 누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느냐 한판 붙자는 식이더라는 것이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비록 머슴이라도 자식새끼에 관한 한 주인에게 꿀리지 않았다. 나는 안 돼도 내 새끼대에는 당신을 이길 수 있어. 이런 사회가 건강하다. 그래야 허허 웃는 여유가 있고 재스민혁명 같은 폭동이 없다.
미국 사람들이 자식의 삶은 현재보다 나아질 거라고 믿은 것은 1960년대까지였다. 그 이후론 내리막이었다. 메릴린대학 에릭 우슬러너 교수가 도전해 그 이유를 밝혀냈다. 처음 보는 두 사람이 서로 신뢰하는 정도, 즉 일반신뢰가 높을수록 인간들은 미래를 밝게 보더라는 것이다. 연구결과 1960년대에는 60%가량 사람들이 서로 믿는다 했다. 그러더니 70년대 50%, 90년대 40%까지 뚝뚝 떨어지더니 2006년에는 32%로 최저점을 찍었다. 어떤 학자가 똑같은 나라에서 어떤 지역은 잘살고 어떤 지역은 왜 못사는지를 연구해 본 결과 최종 해답은 상호불신이었다고 한다.
이런 사회에서 하층민은 신분 상승의 기회를 잃는다. 우선 키워주겠다는 천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서로 신뢰하지 않는 사회는 가족 외에는 믿지 마라는 폐쇄성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힘을 합칠 수가 없다. 그러면 성장속도가 떨어진다. 편을 갈라 싸웠던 제주 강정마을을 상기해보라.
우리는 인터넷신문, SNS를 비롯한 소셜매체가 급증하는 정당성을 인간의 표현의 자유 확대에서 찾았다. 말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인터넷의 대가 모로조프 에브게니는 불세출의 걸작 인터넷환상(the net delusion)에서 뭐라고 갈파했던가. 사이버 유토피아, 그건 신기루라 했다. 인권을 보호하지도 높여주지도 못하고 경제발전의 후퇴만 가져온다고 역설했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편향 동화가 심해질수록 불신은 증폭된다. 나꼼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만 듣고 그 창을 통해 보는 뒤틀린 세상을 현실이라 믿는다. 몇몇 법관들은 대통령을 희화하고 대법관조차 조롱하는데, 제 발등을 찍는 미련한 짓이다. 그 판사들은 판결의 지위를 정의의 심판대에서 시빗거리로 전락시켰다. 사이버 유토피아를 믿는 이들은 좋은 판사, 나쁜 판사로 편가르고 판사들은 판사 자신들을 못 믿도록 세상을 몰아간 것이다.
불신의 벽을 높게 쳐 놓고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유도하며 추종자를 부르는 자들은 누구이며 누가 그들을 추종하는가. 추종자들 중에는 사회적 약자들의 수가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은 최대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며 비꼬는 권력으로 재미보는 소수의 자들이 최대의 가해자다. 그리하여 자신은 물론 자식세대까지 가망없는 절망에 빠뜨린다.
[김세형 논설실장]
정치의 시즌에 갑자기 시선을 모으는 강남좌파 교수, 청춘콘서트의 스타더러 국회의원 출마 의향을 넌지시 물으면 \"날 뭘로 보느냐\"고 모욕을 당한 사람처럼 반응한다고 한다. 금배지보다 훨씬 높은 곳에 사는 초(超)권력자들이다.
인간 군상의 변화상을 정통적으로 묵직하게 알려주는 계기판은 그래도 통계청이 2년마다 내놓는 사회조사통계다.
이 조사에서 꺼림칙한 부분은 자식세대의 신분 상승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일찌기 한국 발전사에서 보지 못한 퇴행적 사고다. 본인의 신분 상승이 어렵다는 실망감은 그렇다고 치고 자식세대가 잘될 것이란 기대감이 41.7%로 2년 만에 7% 가까이 줄었다니….
문득 어떤 장관이 자기 집 가정부와 애들 문제 때문에 신경전을 벌였다는 기억이 떠오른다. 얘기인즉 장관의 아들과 가정부의 아들 중 누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느냐 한판 붙자는 식이더라는 것이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비록 머슴이라도 자식새끼에 관한 한 주인에게 꿀리지 않았다. 나는 안 돼도 내 새끼대에는 당신을 이길 수 있어. 이런 사회가 건강하다. 그래야 허허 웃는 여유가 있고 재스민혁명 같은 폭동이 없다.
미국 사람들이 자식의 삶은 현재보다 나아질 거라고 믿은 것은 1960년대까지였다. 그 이후론 내리막이었다. 메릴린대학 에릭 우슬러너 교수가 도전해 그 이유를 밝혀냈다. 처음 보는 두 사람이 서로 신뢰하는 정도, 즉 일반신뢰가 높을수록 인간들은 미래를 밝게 보더라는 것이다. 연구결과 1960년대에는 60%가량 사람들이 서로 믿는다 했다. 그러더니 70년대 50%, 90년대 40%까지 뚝뚝 떨어지더니 2006년에는 32%로 최저점을 찍었다. 어떤 학자가 똑같은 나라에서 어떤 지역은 잘살고 어떤 지역은 왜 못사는지를 연구해 본 결과 최종 해답은 상호불신이었다고 한다.
이런 사회에서 하층민은 신분 상승의 기회를 잃는다. 우선 키워주겠다는 천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서로 신뢰하지 않는 사회는 가족 외에는 믿지 마라는 폐쇄성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힘을 합칠 수가 없다. 그러면 성장속도가 떨어진다. 편을 갈라 싸웠던 제주 강정마을을 상기해보라.
우리는 인터넷신문, SNS를 비롯한 소셜매체가 급증하는 정당성을 인간의 표현의 자유 확대에서 찾았다. 말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인터넷의 대가 모로조프 에브게니는 불세출의 걸작 인터넷환상(the net delusion)에서 뭐라고 갈파했던가. 사이버 유토피아, 그건 신기루라 했다. 인권을 보호하지도 높여주지도 못하고 경제발전의 후퇴만 가져온다고 역설했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편향 동화가 심해질수록 불신은 증폭된다. 나꼼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만 듣고 그 창을 통해 보는 뒤틀린 세상을 현실이라 믿는다. 몇몇 법관들은 대통령을 희화하고 대법관조차 조롱하는데, 제 발등을 찍는 미련한 짓이다. 그 판사들은 판결의 지위를 정의의 심판대에서 시빗거리로 전락시켰다. 사이버 유토피아를 믿는 이들은 좋은 판사, 나쁜 판사로 편가르고 판사들은 판사 자신들을 못 믿도록 세상을 몰아간 것이다.
불신의 벽을 높게 쳐 놓고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유도하며 추종자를 부르는 자들은 누구이며 누가 그들을 추종하는가. 추종자들 중에는 사회적 약자들의 수가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은 최대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며 비꼬는 권력으로 재미보는 소수의 자들이 최대의 가해자다. 그리하여 자신은 물론 자식세대까지 가망없는 절망에 빠뜨린다.
[김세형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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