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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칼럼/1.18] 학생인권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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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661회 작성일 2012-01-1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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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조선시대 문신 이문건(1494-1567)은 손꼽히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에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직을 배출했고 과거시험 합격자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불운했다. 조선시대 개혁정치의 대명사였던 조광조를 스승으로 모신 그는 정쟁에 휘말려 유배로 보낸 세월만 23년에 달했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모처럼 기쁜 일이 생겼다. 57세 때 유일한 손자 이수봉을 얻은 것이다. 이문건은 감격한 나머지 아이의 성장 과정을 상세히 기록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조선시대 역사에서 보기 드문 할아버지의 양육 일기인 ‘양아록(養兒錄)’이 탄생한 배경이다.



사랑과 훈육 함께 한 전통 교육



이문건은 손자가 6세 때 아버지를 잃자 직접 손자 교육을 맡게 된다. 손자는 놀기 좋아하고 게을렀다. 손자가 아홉 살이 되던 해 이문건은 회초리를 든다. ‘아이의 종아리를 때리는 것은 내가 나빠서가 아니라 아이의 나쁜 습관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아이의 잘못된 습관을 방치한다면 점점 굳어져서 마침내는 고치기 어렵게 된다. 아이가 가엾다고 오냐오냐 한다면 일마다 비위를 맞춰줘야 할 것이다.’ 그날 남긴 이문건의 글이다.



그러나 손자의 나쁜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손자는 12세 때부터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손자가 만취해서 귀가 하는 날 할아버지는 모든 가족에게 그에게 매를 때리라고 명령했다. 누나와 할머니가 10대 씩 때리고 이문건 자신은 20대 넘게 때렸다. 조선 명문가의 자녀교육이 상당히 엄격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아이들의 ‘나쁜 버릇’에 대한 경계심은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 율곡 이이(1536-1584)가 쓴 ‘격몽요결(擊蒙要訣)’에도 나와 있다. 이이는 ‘사람이 학문에 뜻을 가지고는 있으나 성취하는 바가 없는 것은 낡은 습관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낡은 습관’의 첫 번째 사례로 ‘마음과 뜻을 게을리 하고 몸가짐을 함부로 해서 그저 한가하고 편한 것만을 생각하고 속박을 싫어하는 것’을 들었다. ‘격몽(擊蒙)’이라는 말은 ‘몽매함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아이들에게 꾸준한 수업과 엄한 꾸짖음을 통해 완성된 인격체로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전통적인 청소년관(觀)이 담겨 있다.



서울시의회가 지난해 연말 통과시킨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서울시교육청의 재의 요청에 따라 다시 서울시의회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학생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규정한 이 조례는 현재 후보자 매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진보 교육감’ 곽노현 씨의 작품이다. 비록 재의(再議) 요청이 진행되고는 있지만 내일 열리는 곽 씨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 이하의 선고가 나오게 되면 곽 씨는 교육감 직에 복귀한다. 이렇게 되면 곽 교육감이 재의 요청을 취소한 뒤 바로 조례를 공포할 계획이라는 얘기가 곽 씨 주변에서 흘러나온다.
권리만 나열한 조례는 시대착오



서울학생인권조례는 그 자체로서 수준 미달이다. 조례가 학생들에게 부여한 권리는 집회의 자유, 동성애 임신으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 두발 복장 자유 등 24개 조항에 이른다. 반면 학생의 책임에 대해서는 ‘교사나 다른 학생의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만 짧게 언급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책무 없이 권리의 보따리만 잔뜩 안겨주고 있다. 법률적 균형을 상실했다.



학생 집회의 자유는 앞서 도입된 경기도와 광주의 학생인권조례에도 포함되지 않는 조항이다. 이번 조례를 주도한 좌파 단체들은 2008년 촛불시위의 정신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민주통합당 역시 ‘촛불 민심 계승’을 새 강령에 포함시켰다. 당시 일부 세력의 거짓 선동에 거리로 나온 학생들을 보고 이들은 크게 고무됐다. 학부모들의 비판을 감수하면서 집회 자유 조항을 강행한 것은 학생들의 집회 참여를 제도화함으로써 촛불 세력을 확장하려는 의도로 의심할 만 하다.



이런 저런 정치적 배경을 떠나 이 조례는 현재의 교육 현실에 대한 고민을 전혀 담지 못하고 있는 점에 시대착오적이다. 최근 왕따 폭력 같은 문제도 자녀에 대한 학부모의 과잉보호, 자기 자식만을 앞세우는 세태에서 비롯되는 측면도 적지 않다. 어른으로써 미래 세대의 책임의식을 일깨워 주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나무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감싸는 일이 적지 않다. 선진국과 달리 자녀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부모가 자식 부양을 계속해야 하고 그로 인한 사회적 부담도 커지고 있다.



16세기 이문건의 손자는 할아버지의 정성 들인 교육에도 기대처럼 성장해주지 못했다. 크게 상심한 이문건은 ‘양아록’ 말미에 ‘할아버지와 손자 모두 실망하여 남은 것이 없으니 이 늙은이가 죽은 뒤에나 그칠 것이다. 아 눈물이 흐른다’고 썼다. 그의 일기도 여기서 끝이 난다. 예나 지금이나 자녀교육의 지난함을 절감할 수 있다. 요즘 세대도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이 필요한지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교육 문제는 풀려나가기 힘들 것이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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