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균 J special] 게르니카 폭격 75년 … 지식·예술인 문화전쟁의 무대였던 스페인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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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0,915회 작성일 2012-02-24 11:29본문
20세기 이념의 경연장 … 이념의 광기는 집단의 악마성을 배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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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La Guerra Civil Espanola·1936~39)은 증오의 서사(敍事)극이다. 내전은 공포와 처형, 보복의 무대다. 스페인 내전은 이념의 광기(狂氣)가 서려 있다. 이념 세례는 집단의 악마성을 배양한다. 같은 국민, 같은 민족의 동포애는 사라진다. 스페인 내전은 6·25 한국전쟁의 모델이다. 1930년대 유럽은 이념의 시대였다. 자유민주주의, 파시즘, 공산주의는 진화하면서 충돌했다. 스페인의 이념 스펙트럼은 더욱 넓었다. 좌파 인민전선(공화정부)에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노동당, 사회주의, 급진공화, 생디칼리슴이 자리했다. 우파 국민전선(프랑코 군부)에는 파시즘, 가톨릭, 왕당파, 팔랑헤당, 우파 공화주의가 모였다. 그 시대 모든 이념이 출몰했다.
바르셀로나·마드리드·게르니카, 기억의 현장에서
글·사진 = 박보균 대기자
그 시대 지식인, 예술가들은 스페인 내전에 상상력과 신념을 투사했다. 내전의 한쪽은 문화전쟁이었다. 그 한복판에 파블로 피카소(스페인·1881~1973), 조지 오웰(영국·1903~1950), 어니스트 헤밍웨이(미국·1899~1961)가 있다. 세 사람은 인민전선을 지지했다. 오웰은 혁명의 배신을 경험한 뒤 이탈했다. 거장(巨匠)들은 자기 방식대로 유산을 남겼다. ‘게르니카’(Guernica·피카소), 『카탈루냐 찬가』(Homage to Catalonia·오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헤밍웨이)-.
올해가 게르니카 폭격 75주년이다. 이번 겨울 나는 스페인 내전의 ‘기억의 현장’과 상징을 찾았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게르니카, 과다라마 산맥 주변 도시를 돌았다.
바르셀로나의 매력은 복합적이다. 피카소 미술관, 안토니오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 FC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 도시의 다각적인 역사-. 바르셀로나는 혁명의 도시였다. 스페인 내전은 도시를 혁명의 열정으로 들끓게 했다. 도시는 프랑코의 군사 반란에 반발, 궐기했다. 아나키스트들과 노동조합원, 공산당원은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했다.
그들은 ‘파시즘 반란 저지, 공화국 사수’의 대의(大義)에 집결했다. 그 명분은 세계 지식인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당시 33세)은 바르셀로나에 갔다. 1936년 12월이다. 취재할 생각으로 갔다가 통일노동자당(P.O.U.M) 소속 의용군(miliciano)으로 입대했다.
바르셀로나는 노동자 자치의 해방구(Zona libre)로 가동했다. 레스토랑, 이발소 종업원들은 팁을 거절했다. 언어가 달라졌다. 아내도 ‘여성동무’로 불렀다. 건강하세요(Salud)가 안녕하세요(Buenos dias)를 대신했다. 가톨릭 성당은 파괴됐다. 사치스러운 상류층 패션은 사라졌다.
의용군의 사기는 높았다. 분대장, 장교는 사병 선거로 뽑혔다. 현실은 열악했다. 군복은 제각각이었다. 총은 낡았다. 오웰은 동북부 아라곤 전선에 배치됐다. 1937년 5월 그는 저격병의 총에 맞았다. 목에 관통상을 당하는 중상이었다. 빈약한 의료시설 속에 기적적으로 살았다. 도시로 돌아왔다. 아내가 찾아왔다.
바르셀로나는 변질됐다.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는 대치했다. ‘내전 속 내전’, 노선 투쟁이 벌어졌다. 소련의 대규모 군수 지원은 공산주의자의 장악을 뒷받침했다. 공산주의의 본능은 권력의 분산을 혐오한다. 그들은 숙청에 나섰다. 반대 세력을 ‘프랑코의 앞잡이, 트로츠키파의 제오열(第五列)’로 몰았다. 오웰은 수배자 신세가 됐다. 오웰은 바르셀로나 중심부 람블라스 거리(Las Ramblas)에서 도피처를 찾아 방황했다.
람블라스 거리 근처에 ‘조지 오웰 광장’이 있다. 거리 중간쯤에서 골목 100m쯤 안에 있다. 서울의 동사무소 앞 공터 크기다. 거기에 초현실주의 조각가 크리스토폴(Leandre Cristofol)의 작품이 서 있다. 8m 높이의 조각은 지구 모양을 위쪽에 형상화했다. 받침대 격인 둥근 돌을 흰색 쇠 통이 힘차게 휘감고 있다. 그 조각은 오웰의 지적 고뇌, 진실의 집요한 탐사 욕구와 어울린다. 오웰의 본명(Eric Arthur Blair)을 적은 작은 표지판이 광장의 존재를 확인해준다.
나는 람블라스 거리의 카페 이나카바다(inacabada·미완성)에 앉았다. 람블라스는 스페인적 열정과 낭만이 넘친다. 오웰이 갔던 카페와 같은 이름이다. 그곳을 함께 찾았던 호세 카몬 아스나르(52·전직 역사 교사)는 감회에 젖었다.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웰에게 스페인 내전은 무엇인가.
“스페인 내전은 공화파 대 파시즘의 대결이 기본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내전의 또 다른 의미는 혁명이었다.”
●오웰은 사회주의자다. 왜 공산주의에 분노했나.
“혁명은 타락과 배신의 속성을 갖고 있다. 인민전선의 공화파는 분열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인민전선 내부의 적을 미워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심지어 아나키스트 군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지 않았다. 내부 분열은 내전 패배의 핵심 요인이었다.”
오웰은 좌절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7월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탈출했다. 영국으로의 귀향에 성공했다. 그는 경험을 책으로 옮겼다. 르포 소설 『카탈루냐 찬가』는 38년에 발표했다.
오웰은 스탈린 공산주의와 히틀러 나치즘의 유사성을 간파했다. 전체주의적 압제와 인간성 말살, 음모와 대중조작의 속성이 같다는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고발한다. 그 책이 『동물농장』(45년)과 『1984년』(48년)이다.
게르니카는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이다. 1937년 봄 프랑코의 국민군은 북부로 전력을 옮겼다. 히틀러의 나치 콘도르(Condor)군단은 지원에 나섰다. 독일 공군은 제2차 세계대전의 공습 시연(試演)회로 삼았다.
1937년 4월 26일 장터가 열려 주민들이 모였다. 나치 비행대대는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융단(絨緞)폭격을 했다. 촘촘하게 무차별 폭격했다. 융커 52 폭격기들은 250㎏ 폭탄, 소이탄을 투하했다. 건물과 집들이 무너졌다. 화재가 일어났다. 하인켈 51전투기는 민간인에게 기총 소사(掃射)를 했다.
게르니카는 죽음의 도시로 바뀌었다. 인구 7000명의 작은 마을은 부서지고 불에 탔다. 잿더미 속에 사망자만 1600여 명(당시 바스크 정부 추산, 최근 한 연구조사는 500명 전후로 추정).
프랑스에 살던 피카소는 비극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스페인 공화정부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고 있었다. 그해 6월 파리 국제박람회 전시용이다. 그는 작품 의지를 표출했다. “나는 스페인을 고통과 죽음의 바다로 밀어넣은 군부 세력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표시할 것이다”-.
그의 천재성이 작동했다. 거대한 캔버스(세로 3.49m, 가로 7.76m)에 참상을 옮겼다. 죽은 아이를 양팔에 안은 여인, 공포 속에서 절규하는 여인, 말의 겁먹은 눈과 벌어진 입, 창 같은 귀를 가진 오만한 황소···, 흑과 백, 회색만이 사용됐다.
피카소는 야만적 대학살에 충격적인 시각 메시지로 응징했다. 하지만 박람회에선 결정적인 주목을 끌지 못했다. 비판자들은 “기괴한 이미지들을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배열해 관객을 잡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1939년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됐다.
나는 바르셀로나를 떠나 게르니카로 향했다. 바스크의 중심 빌바오에서 버스로 40여 분 거리다. 도시엔 공습과 파괴의 흔적은 없다. 질서정연하게 재건됐다. 공습의 기억은 주택가 담에 걸린 게르니카 벽화(mural)다. 사진을 찍어 타일에 옮겨 붙였다. 그림 아래 스페인 공식어와 바스크어(GERNIKARA)로 각각 쓰여 있다. 그곳 관광안내소에서 향토 사학자(프란시스코 캄바·61)를 만났다.
●그림 게르니카의 의미는.
“전쟁의 최종 승자는 국민전선의 프랑코였다. 그러나 선전 전선에서의 역사적 승리는 공화파 쪽이었다. 그 승리의 원동력에 피카소가 있다. 그는 게르니카 만행을 예술로 규탄했다. 그 덕분에 좌파는 선(善)과 약자 쪽의 이미지를 강화했다.”
●게르니카가 마드리드에 전시돼 있다.
“게르니카는 바스크 자치의 신성한 상징이다. 이웃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에 게르니카를 전시해야 한다.”
게르니카는 ‘최후의 망명자’였다. 피카소는 조국의 인권 회복 때까지 게르니카의 조국 전시를 반대했다. 피카소는 뉴욕 현대미술관에 가지 못했다. 그는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 일부 그림은 반미 선전에 쓰였다. 미국은 피카소의 입국을 금지했다. 피카소는 프랑코를 증오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공포정치에 침묵했다.
피카소는 1973년 숨졌다(92세). 그리고 4년 뒤인 1975년 11월 철권 통치자 프랑코가 사망했다(83세). 스페인은 민주화의 길을 열었다. 1981년 피카소 탄생 100주년, 게르니카는 뉴욕의 망명생활을 청산했다. 마드리드로 갔다. 제작 44년 만이다. 그것은 ‘내전의 진정한 종식’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거역할 수 없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대작이 걸린 수도 마드리드로 갔다. 레니아 소피아(Renia Sofia) 미술관 2층 6호실-. 게르니카가 걸려 있다. 관객들은 게르니카 앞에 모여 있다. 관객들은 시선을 경쟁적으로 고정한다. 그리고 대작에서 뿜어 나오는 예술적 위압에 전율하는 듯한 표정이다. 게르니카는 전쟁의 세기, 20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품이다. 그 전시실은 예술의 순례지다. 문화습관이 됐다.
스페인 내전은 헤밍웨이의 두 번째 전쟁이다. 그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했다.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는 그때의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그는 전쟁과 스페인에 매료됐다. 투우는 그에게 소설적 영감의 원천이다. 투우는 두엔데(duende·불가사의한 매혹), 영웅주의, 긴장과 숙명을 드러냈다.
헤밍웨이는 37년 1월 마드리드로 갔다. ‘북미 신문연합’의 종군기자였다. 그는 네 차례 내전 현장을 찾았다. 공화 정부는 헤밍웨이를 위해 취재 지원을 했다.
헤밍웨이는 톨스토이를 동경했다. 그는 자기 방식으로 『전쟁과 평화』를 썼다. 그의 야심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집약됐다.
1937년 5월 공화군은 마드리드에서 북쪽의 세고비아 공략에 나섰다. 과다라마 산맥이 공격의 무대가 된다. 그 작전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배경이 된다. 주인공 로버트 조던은 미국인 강사다. 그는 교량 폭파 기술을 가졌다. 그는 의용군으로 와서 산악 게릴라 부대에 합세했다. 프랑코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해 뭉친다. 다리 폭파에 성공한 뒤 조던은 부상을 당한다. 그리고 혼자 남아 죽는다(실제론 공화파 군대의 과다라마 작전은 실패한다). 그때 헤밍웨이의 나이는 38세. 소설 속에 나오는 도시 엘에스코리알에 갔다. 호세 아스나르와 동행했다. 그와 대화를 나눴다.
●헤밍웨이에게 내전은 무엇인가.
“헤밍웨이에게 전쟁은 숙명이다. 헤밍웨이의 주인공은 도전과 투쟁에 충실했다. 그는 공화국의 내전 승리를 위해 공산주의 노선을 지지했다. 하지만 특정 시기, 특정 방법론으로서의 공산주의 지지였을 뿐이었다. 그는 이기적인 자유인이었다.”
●좌파가 승리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프랑코는 잔인한 청산과 보복을 했다. 하지만 좌파가 승리했어도 보복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처형과 희생의 규모가 프랑코 체제보다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색(el terror blanco) 테러나 적색 테러(rojo) 모두 유혈과 저주의 본성은 마찬가지다.”
최후의 승자, 철권 통치자 프랑코
신중했던 기회주의자
화해의 ‘전몰자 계곡’
전승 기념관 이미지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1892~1975)는 내전의 최종 승자다. 39년간 최고지도자(Caudillo)였다. 내전 동안 가톨릭과 서구문명의 수호자로 자임했다. 정화(淨化·limpieza)를 체제 관리의 개념으로 삼았다. 좌파 공화진영에 오염된 세력의 퇴출이다.
초급장교 시절 작은 키에 작은 목소리의 그는 유약해 보였다. 하지만 신중, 영리했고 기회주의적이었다. 그는 내전 과정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결정적 지원을 받는다. 그 후 2차 대전 때 히틀러의 합류 요청을 받는다. 그는 회피와 지연으로 교묘하게 중립을 유지했다. 독재정치 속에 60년대 후반 ‘스페인의 기적’(miliagro)으로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이룬다. 그는 “나는 오직 신과 역사 앞에 책임질 뿐”이라고 말했다.
프랑코의 독특한 유산이 남아 있다. 전몰자 계곡(El Valle de los Caidos)-.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20㎞ 떨어진 곳이다. 과다라마 산맥의 거친 암벽에 구멍을 뚫고 공간을 만들었다. 그 안에 거대한 지하 성당을 지었다. 성당 길이는 260m, 그 안쪽 한복판 바닥 아래에 프랑코가 묻혔다. 천장은 밖의 125m 높이의 십자가와 닿아있다.
프랑코는 그 조형물을 내전 화해의 상징으로 내걸었다. 41~59년 인부 2000여 명을 동원했다. 인부는 정치범도 많았다. 국민·공화군 수만 명의 유해도 안장돼 있다. 기이하고 거창한 조형물은 화해와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프랑코의 전쟁 승리 기념관의 이미지가 강하다. 프랑코 유해 이장 논란도 계속된다.
내전 중 유혈과 살인은 양쪽 모두에서 이뤄졌다. 승자인 우파가 더 많이 저질렀다. 좌(공화)·우(국민) 양 진영의 군인은 35만여 명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방에서 프랑코파는 공화파 5만~20만 명을 처형한 것으로 추정된다. 좌파 인민전선이 처형한 프랑코파 희생자는 3만8000여 명 정도. 7000여 명의 가톨릭 사제와 수녀도 인민전선에 의해 살해됐다. 내전 종식 뒤 50만여 명이 프랑스로 탈출했다. 이 중 15만 명 정도가 귀국했다. 포로수용소에는 40만 명이 수용됐다.
내전 전야
1936년은 스페인 역사상 결정적 한 해였다. 2월 16일 의회(코르테스, Cortes)선거가 있었다. 선거는 스페인 사회의 수세기간의 갈등과 대립을 폭발시켰다. 선거 한 달 전 좌파진영은 단일 연대에 성공했다. 인민전선(Frente Popular)을 극적으로 형성했다. 좌파는 신승(15만 표, 2% 차)했다. 좌파 권력은 급속한 변화를 추구했다. 토지 개혁, 은행과 대기업 국유화 논란, 노동자들의 대량파업이 이어졌다. 우파는 볼셰비키 정권이 출현한 것처럼 반발했다. 36년 7월 17일 북아프리카의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군부 반란이 시작됐다. 프랑코가 중심 세력이었다.
내전은 유럽의 정치 질서를 흔들었다. 국제 대리전으로 확산된다.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프랑코를 지원했다. 소련의 스탈린, 멕시코의 좌파정권은 공화 정부를 밀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중립에 섰다.
바르셀로나·마드리드·게르니카, 기억의 현장에서
글·사진 = 박보균 대기자
올해가 게르니카 폭격 75주년이다. 이번 겨울 나는 스페인 내전의 ‘기억의 현장’과 상징을 찾았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게르니카, 과다라마 산맥 주변 도시를 돌았다.
바르셀로나의 매력은 복합적이다. 피카소 미술관, 안토니오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 FC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 도시의 다각적인 역사-. 바르셀로나는 혁명의 도시였다. 스페인 내전은 도시를 혁명의 열정으로 들끓게 했다. 도시는 프랑코의 군사 반란에 반발, 궐기했다. 아나키스트들과 노동조합원, 공산당원은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했다.
그들은 ‘파시즘 반란 저지, 공화국 사수’의 대의(大義)에 집결했다. 그 명분은 세계 지식인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당시 33세)은 바르셀로나에 갔다. 1936년 12월이다. 취재할 생각으로 갔다가 통일노동자당(P.O.U.M) 소속 의용군(miliciano)으로 입대했다.
바르셀로나는 노동자 자치의 해방구(Zona libre)로 가동했다. 레스토랑, 이발소 종업원들은 팁을 거절했다. 언어가 달라졌다. 아내도 ‘여성동무’로 불렀다. 건강하세요(Salud)가 안녕하세요(Buenos dias)를 대신했다. 가톨릭 성당은 파괴됐다. 사치스러운 상류층 패션은 사라졌다.
의용군의 사기는 높았다. 분대장, 장교는 사병 선거로 뽑혔다. 현실은 열악했다. 군복은 제각각이었다. 총은 낡았다. 오웰은 동북부 아라곤 전선에 배치됐다. 1937년 5월 그는 저격병의 총에 맞았다. 목에 관통상을 당하는 중상이었다. 빈약한 의료시설 속에 기적적으로 살았다. 도시로 돌아왔다. 아내가 찾아왔다.
바르셀로나는 변질됐다.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는 대치했다. ‘내전 속 내전’, 노선 투쟁이 벌어졌다. 소련의 대규모 군수 지원은 공산주의자의 장악을 뒷받침했다. 공산주의의 본능은 권력의 분산을 혐오한다. 그들은 숙청에 나섰다. 반대 세력을 ‘프랑코의 앞잡이, 트로츠키파의 제오열(第五列)’로 몰았다. 오웰은 수배자 신세가 됐다. 오웰은 바르셀로나 중심부 람블라스 거리(Las Ramblas)에서 도피처를 찾아 방황했다.
람블라스 거리 근처에 ‘조지 오웰 광장’이 있다. 거리 중간쯤에서 골목 100m쯤 안에 있다. 서울의 동사무소 앞 공터 크기다. 거기에 초현실주의 조각가 크리스토폴(Leandre Cristofol)의 작품이 서 있다. 8m 높이의 조각은 지구 모양을 위쪽에 형상화했다. 받침대 격인 둥근 돌을 흰색 쇠 통이 힘차게 휘감고 있다. 그 조각은 오웰의 지적 고뇌, 진실의 집요한 탐사 욕구와 어울린다. 오웰의 본명(Eric Arthur Blair)을 적은 작은 표지판이 광장의 존재를 확인해준다.
나는 람블라스 거리의 카페 이나카바다(inacabada·미완성)에 앉았다. 람블라스는 스페인적 열정과 낭만이 넘친다. 오웰이 갔던 카페와 같은 이름이다. 그곳을 함께 찾았던 호세 카몬 아스나르(52·전직 역사 교사)는 감회에 젖었다.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전사로 참전한다. 그는 중상을 입었고 공화파 혁명의 배신을 경험한다. 그리고 탈출한다. 바르셀로나의 중심가 람블라스 거리 안쪽에 작은 공간의 조지 오웰 광장이 있다.
●오웰에게 스페인 내전은 무엇인가.
“스페인 내전은 공화파 대 파시즘의 대결이 기본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내전의 또 다른 의미는 혁명이었다.”
●오웰은 사회주의자다. 왜 공산주의에 분노했나.
“혁명은 타락과 배신의 속성을 갖고 있다. 인민전선의 공화파는 분열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인민전선 내부의 적을 미워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심지어 아나키스트 군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지 않았다. 내부 분열은 내전 패배의 핵심 요인이었다.”
오웰은 좌절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7월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탈출했다. 영국으로의 귀향에 성공했다. 그는 경험을 책으로 옮겼다. 르포 소설 『카탈루냐 찬가』는 38년에 발표했다.
오웰은 스탈린 공산주의와 히틀러 나치즘의 유사성을 간파했다. 전체주의적 압제와 인간성 말살, 음모와 대중조작의 속성이 같다는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고발한다. 그 책이 『동물농장』(45년)과 『1984년』(48년)이다.
게르니카는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이다. 1937년 봄 프랑코의 국민군은 북부로 전력을 옮겼다. 히틀러의 나치 콘도르(Condor)군단은 지원에 나섰다. 독일 공군은 제2차 세계대전의 공습 시연(試演)회로 삼았다.
1937년 4월 26일 장터가 열려 주민들이 모였다. 나치 비행대대는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융단(絨緞)폭격을 했다. 촘촘하게 무차별 폭격했다. 융커 52 폭격기들은 250㎏ 폭탄, 소이탄을 투하했다. 건물과 집들이 무너졌다. 화재가 일어났다. 하인켈 51전투기는 민간인에게 기총 소사(掃射)를 했다.
바스크의 성지 게르니카는 잿더미가 됐다. 피카소의 천재성은 참상을 미술사상 가장 충격적으로 전달한다. 대작 ‘게르니카’는 수도 마드리드의 소피아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도시 게르니카에는 주택가 담벼락에 벽화로 존재해 있다.
게르니카는 죽음의 도시로 바뀌었다. 인구 7000명의 작은 마을은 부서지고 불에 탔다. 잿더미 속에 사망자만 1600여 명(당시 바스크 정부 추산, 최근 한 연구조사는 500명 전후로 추정).
프랑스에 살던 피카소는 비극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스페인 공화정부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고 있었다. 그해 6월 파리 국제박람회 전시용이다. 그는 작품 의지를 표출했다. “나는 스페인을 고통과 죽음의 바다로 밀어넣은 군부 세력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표시할 것이다”-.
그의 천재성이 작동했다. 거대한 캔버스(세로 3.49m, 가로 7.76m)에 참상을 옮겼다. 죽은 아이를 양팔에 안은 여인, 공포 속에서 절규하는 여인, 말의 겁먹은 눈과 벌어진 입, 창 같은 귀를 가진 오만한 황소···, 흑과 백, 회색만이 사용됐다.
피카소는 야만적 대학살에 충격적인 시각 메시지로 응징했다. 하지만 박람회에선 결정적인 주목을 끌지 못했다. 비판자들은 “기괴한 이미지들을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배열해 관객을 잡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1939년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됐다.
나는 바르셀로나를 떠나 게르니카로 향했다. 바스크의 중심 빌바오에서 버스로 40여 분 거리다. 도시엔 공습과 파괴의 흔적은 없다. 질서정연하게 재건됐다. 공습의 기억은 주택가 담에 걸린 게르니카 벽화(mural)다. 사진을 찍어 타일에 옮겨 붙였다. 그림 아래 스페인 공식어와 바스크어(GERNIKARA)로 각각 쓰여 있다. 그곳 관광안내소에서 향토 사학자(프란시스코 캄바·61)를 만났다.
●그림 게르니카의 의미는.
“전쟁의 최종 승자는 국민전선의 프랑코였다. 그러나 선전 전선에서의 역사적 승리는 공화파 쪽이었다. 그 승리의 원동력에 피카소가 있다. 그는 게르니카 만행을 예술로 규탄했다. 그 덕분에 좌파는 선(善)과 약자 쪽의 이미지를 강화했다.”
●게르니카가 마드리드에 전시돼 있다.
“게르니카는 바스크 자치의 신성한 상징이다. 이웃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에 게르니카를 전시해야 한다.”
게르니카는 ‘최후의 망명자’였다. 피카소는 조국의 인권 회복 때까지 게르니카의 조국 전시를 반대했다. 피카소는 뉴욕 현대미술관에 가지 못했다. 그는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 일부 그림은 반미 선전에 쓰였다. 미국은 피카소의 입국을 금지했다. 피카소는 프랑코를 증오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공포정치에 침묵했다.
피카소는 1973년 숨졌다(92세). 그리고 4년 뒤인 1975년 11월 철권 통치자 프랑코가 사망했다(83세). 스페인은 민주화의 길을 열었다. 1981년 피카소 탄생 100주년, 게르니카는 뉴욕의 망명생활을 청산했다. 마드리드로 갔다. 제작 44년 만이다. 그것은 ‘내전의 진정한 종식’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거역할 수 없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대작이 걸린 수도 마드리드로 갔다. 레니아 소피아(Renia Sofia) 미술관 2층 6호실-. 게르니카가 걸려 있다. 관객들은 게르니카 앞에 모여 있다. 관객들은 시선을 경쟁적으로 고정한다. 그리고 대작에서 뿜어 나오는 예술적 위압에 전율하는 듯한 표정이다. 게르니카는 전쟁의 세기, 20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품이다. 그 전시실은 예술의 순례지다. 문화습관이 됐다.
스페인 내전은 헤밍웨이의 두 번째 전쟁이었다. 그는 종군기자로 현장을 갔다. 그의 야심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공화파의 대의(大義)를 실감나게 전달한다. 그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스페인 내전은 헤밍웨이의 두 번째 전쟁이다. 그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했다.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는 그때의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그는 전쟁과 스페인에 매료됐다. 투우는 그에게 소설적 영감의 원천이다. 투우는 두엔데(duende·불가사의한 매혹), 영웅주의, 긴장과 숙명을 드러냈다.
헤밍웨이는 37년 1월 마드리드로 갔다. ‘북미 신문연합’의 종군기자였다. 그는 네 차례 내전 현장을 찾았다. 공화 정부는 헤밍웨이를 위해 취재 지원을 했다.
헤밍웨이는 톨스토이를 동경했다. 그는 자기 방식으로 『전쟁과 평화』를 썼다. 그의 야심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집약됐다.
1937년 5월 공화군은 마드리드에서 북쪽의 세고비아 공략에 나섰다. 과다라마 산맥이 공격의 무대가 된다. 그 작전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배경이 된다. 주인공 로버트 조던은 미국인 강사다. 그는 교량 폭파 기술을 가졌다. 그는 의용군으로 와서 산악 게릴라 부대에 합세했다. 프랑코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해 뭉친다. 다리 폭파에 성공한 뒤 조던은 부상을 당한다. 그리고 혼자 남아 죽는다(실제론 공화파 군대의 과다라마 작전은 실패한다). 그때 헤밍웨이의 나이는 38세. 소설 속에 나오는 도시 엘에스코리알에 갔다. 호세 아스나르와 동행했다. 그와 대화를 나눴다.
●헤밍웨이에게 내전은 무엇인가.
“헤밍웨이에게 전쟁은 숙명이다. 헤밍웨이의 주인공은 도전과 투쟁에 충실했다. 그는 공화국의 내전 승리를 위해 공산주의 노선을 지지했다. 하지만 특정 시기, 특정 방법론으로서의 공산주의 지지였을 뿐이었다. 그는 이기적인 자유인이었다.”
●좌파가 승리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프랑코는 잔인한 청산과 보복을 했다. 하지만 좌파가 승리했어도 보복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처형과 희생의 규모가 프랑코 체제보다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색(el terror blanco) 테러나 적색 테러(rojo) 모두 유혈과 저주의 본성은 마찬가지다.”
최후의 승자, 철권 통치자 프랑코
신중했던 기회주의자
화해의 ‘전몰자 계곡’
전승 기념관 이미지
‘전몰자 계곡’. 프랑코는 내전의 화해를 내걸고 거친 암벽을 뚫어 거대한 성당을 지었다 .
프란시스코 프랑코
초급장교 시절 작은 키에 작은 목소리의 그는 유약해 보였다. 하지만 신중, 영리했고 기회주의적이었다. 그는 내전 과정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결정적 지원을 받는다. 그 후 2차 대전 때 히틀러의 합류 요청을 받는다. 그는 회피와 지연으로 교묘하게 중립을 유지했다. 독재정치 속에 60년대 후반 ‘스페인의 기적’(miliagro)으로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이룬다. 그는 “나는 오직 신과 역사 앞에 책임질 뿐”이라고 말했다.
프랑코의 독특한 유산이 남아 있다. 전몰자 계곡(El Valle de los Caidos)-.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20㎞ 떨어진 곳이다. 과다라마 산맥의 거친 암벽에 구멍을 뚫고 공간을 만들었다. 그 안에 거대한 지하 성당을 지었다. 성당 길이는 260m, 그 안쪽 한복판 바닥 아래에 프랑코가 묻혔다. 천장은 밖의 125m 높이의 십자가와 닿아있다.
프랑코는 그 조형물을 내전 화해의 상징으로 내걸었다. 41~59년 인부 2000여 명을 동원했다. 인부는 정치범도 많았다. 국민·공화군 수만 명의 유해도 안장돼 있다. 기이하고 거창한 조형물은 화해와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프랑코의 전쟁 승리 기념관의 이미지가 강하다. 프랑코 유해 이장 논란도 계속된다.
내전 중 유혈과 살인은 양쪽 모두에서 이뤄졌다. 승자인 우파가 더 많이 저질렀다. 좌(공화)·우(국민) 양 진영의 군인은 35만여 명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방에서 프랑코파는 공화파 5만~20만 명을 처형한 것으로 추정된다. 좌파 인민전선이 처형한 프랑코파 희생자는 3만8000여 명 정도. 7000여 명의 가톨릭 사제와 수녀도 인민전선에 의해 살해됐다. 내전 종식 뒤 50만여 명이 프랑스로 탈출했다. 이 중 15만 명 정도가 귀국했다. 포로수용소에는 40만 명이 수용됐다.
내전 전야
1936년은 스페인 역사상 결정적 한 해였다. 2월 16일 의회(코르테스, Cortes)선거가 있었다. 선거는 스페인 사회의 수세기간의 갈등과 대립을 폭발시켰다. 선거 한 달 전 좌파진영은 단일 연대에 성공했다. 인민전선(Frente Popular)을 극적으로 형성했다. 좌파는 신승(15만 표, 2% 차)했다. 좌파 권력은 급속한 변화를 추구했다. 토지 개혁, 은행과 대기업 국유화 논란, 노동자들의 대량파업이 이어졌다. 우파는 볼셰비키 정권이 출현한 것처럼 반발했다. 36년 7월 17일 북아프리카의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군부 반란이 시작됐다. 프랑코가 중심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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