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칼럼/3.14] ‘깨진 유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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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552회 작성일 2012-03-14 09:12본문
‘깨진 유리창’론으로 유명했던 제임스 윌슨 교수가 지난주 타계했다. 그의 이론은 한마디로 도시 건물의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방치하면 범죄가 늘어난다는 주장이었다. 깨진 유리창과 범죄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대도시 슬럼가의 빈 건물들은 유리창이 깨진 채 방치돼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환경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질서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지고 거칠어져 그런 심리가 범죄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전 뉴욕시장 루돌프 줄리아니는 그의 이론을 받아들여 대대적인 도시 쇄신 운동을 벌였다. 그 덕분에 뉴욕은 범죄 없는 도시로 변모했다. 사람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깨끗한 곳에 가면 휴지 한 장 떨어뜨리는 것도 조심스럽지만 지저분한 곳에 가면 나도 똑같이 무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나라 안보가 깨진 유리창이 되고 있다. 야당의 국회의원 후보가 될 사람이 해군을 해적이라고 불렀다. 입 가진 사람이 무슨 말인들 못하랴 하고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니 그 당의 대표급 인사가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 토론해볼 문제”라고 별일 아닌 듯이 넘어갔다. 깨진 유리창을 지나치듯 말이다.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까지 지낸 사람이 야당 대표와 함께 제주 강정마을에 내려가 ‘정권을 잡게 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해군을 협박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로 인해 “그런 말을 해도 되는 모양이구나” 하면서 국민의 마음이 점점 안보에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깨진 유리창이 범죄가 창궐하는 도시를 만들 듯이 그런 말 한마디가 결국은 나라의 국방의식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아니, 의식적으로 그들은 그 점을 노렸는지도 모른다.
한 나라를 보존케 하는 가치 중 제일의 근본은 국방이다. 국방이 무너져 버리면 민주든, 복지든, 진보든 다 소용이 없게 된다. 이 가치를 위해 때로는 부차적인 가치들이 희생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지금 이 나라가 잘못돼 가고 있는 것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가치의 혼돈이다. 제주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큰 이유가 경제적 이해와 환경문제다. 세계에서 10여 척밖에 안 되는 대형 유람선이 동시에 두 척 접안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서 그렇게 설계를 했다. 그런데도 아니라고 떼를 쓴다. 용암이 흘러나와 굳어진 제주 해안이 모두 비슷한 ‘구럼비’ 해안인데 하나밖에 없는 자연환경을 파손한다고 주장한다. 설령 경제적 이득이 생기지 않고, 자연환경이 조금 훼손되더라도 국방을 위해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집이 허물어질지 모르는데 커튼 걱정을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이들은 지엽적 가치를 들고 나와 근본적 가치를 흔들고 있다.
최근 화제가 된 영화 ‘대처’를 보며 나라를 지키는 원칙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를 점령했을 때 영국 내각은 물론 동맹국인 미국도 전쟁을 반대했다. 대처는 미 국무장관에게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했을 때 그냥 넘어가라고 했다면 당신은 그 말을 들었겠느냐, 나라를 지키는 일은 양보할 수 없는 일”이라며 탈환전쟁에 정치생명을 걸었다. 천안함 사건이 터졌을 때, 연평도 포격을 당했을 때 눈치만 보며 보복의 기회를 놓쳤던 이명박 정부와는 너무나 비교가 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시위 때 “나도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광화문의 촛불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말이 바로 원칙을 무너뜨리고 가치의 혼돈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허물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사회로 변해 가고 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이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선이라는 신념조차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선거가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지키느냐, 허무느냐의 대결이 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안보를 중시하는 보수여당조차 넋이 빠져 깨진 유리창을 보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최근 들어 이 정부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탈북자 송환 농성장에 대통령 비서관을 보내고, 국방부 장관이 연평도를 찾아가 북한에 경고하고, 기획재정부 장관이 포퓰리즘을 비판하고 나섰다.
남은 1년이라는 기간은 결코 짧지 않다. 정부만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이 혼돈에서 나라를 지켜낼 수 있다. 포드 대통령은 임기 종반에 재선을 포기하고 닉슨을 사면해 줌으로써 미국을 분열에서 구해냈다. 그는 “리더십의 궁극적인 시험은 여론을 따라가는 데 있지 않고 당신이 어떤 위험을 택하느냐에 달렸다. 정치적 용기로 인해 패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패배는 용기 없이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정부의 마지막 임무는 국민이 맡긴 공권력, 즉 나라를 보전하라는 명령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다. 그러자면 눈치나 타협이 아니라 용기가 필요하다. 대통령의 마지막 용기를 보고 싶다.
이 나라 안보가 깨진 유리창이 되고 있다. 야당의 국회의원 후보가 될 사람이 해군을 해적이라고 불렀다. 입 가진 사람이 무슨 말인들 못하랴 하고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니 그 당의 대표급 인사가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 토론해볼 문제”라고 별일 아닌 듯이 넘어갔다. 깨진 유리창을 지나치듯 말이다.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까지 지낸 사람이 야당 대표와 함께 제주 강정마을에 내려가 ‘정권을 잡게 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해군을 협박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로 인해 “그런 말을 해도 되는 모양이구나” 하면서 국민의 마음이 점점 안보에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깨진 유리창이 범죄가 창궐하는 도시를 만들 듯이 그런 말 한마디가 결국은 나라의 국방의식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아니, 의식적으로 그들은 그 점을 노렸는지도 모른다.
한 나라를 보존케 하는 가치 중 제일의 근본은 국방이다. 국방이 무너져 버리면 민주든, 복지든, 진보든 다 소용이 없게 된다. 이 가치를 위해 때로는 부차적인 가치들이 희생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지금 이 나라가 잘못돼 가고 있는 것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가치의 혼돈이다. 제주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큰 이유가 경제적 이해와 환경문제다. 세계에서 10여 척밖에 안 되는 대형 유람선이 동시에 두 척 접안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서 그렇게 설계를 했다. 그런데도 아니라고 떼를 쓴다. 용암이 흘러나와 굳어진 제주 해안이 모두 비슷한 ‘구럼비’ 해안인데 하나밖에 없는 자연환경을 파손한다고 주장한다. 설령 경제적 이득이 생기지 않고, 자연환경이 조금 훼손되더라도 국방을 위해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집이 허물어질지 모르는데 커튼 걱정을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이들은 지엽적 가치를 들고 나와 근본적 가치를 흔들고 있다.
최근 화제가 된 영화 ‘대처’를 보며 나라를 지키는 원칙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를 점령했을 때 영국 내각은 물론 동맹국인 미국도 전쟁을 반대했다. 대처는 미 국무장관에게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했을 때 그냥 넘어가라고 했다면 당신은 그 말을 들었겠느냐, 나라를 지키는 일은 양보할 수 없는 일”이라며 탈환전쟁에 정치생명을 걸었다. 천안함 사건이 터졌을 때, 연평도 포격을 당했을 때 눈치만 보며 보복의 기회를 놓쳤던 이명박 정부와는 너무나 비교가 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시위 때 “나도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광화문의 촛불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말이 바로 원칙을 무너뜨리고 가치의 혼돈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허물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사회로 변해 가고 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이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선이라는 신념조차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선거가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지키느냐, 허무느냐의 대결이 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안보를 중시하는 보수여당조차 넋이 빠져 깨진 유리창을 보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최근 들어 이 정부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탈북자 송환 농성장에 대통령 비서관을 보내고, 국방부 장관이 연평도를 찾아가 북한에 경고하고, 기획재정부 장관이 포퓰리즘을 비판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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