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칼럼/4.10]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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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7,632회 작성일 2012-04-10 09:11본문
내일은 선거날이다. 모두들 내 편이냐, 네 편이냐에 예민해져 있다. ‘나꼼수’를 얘기하면 벌써 편이 갈린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어느 편을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거보다 중요한 것이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우리 세대만 살다가 갈 나라가 아니다. 우리 아들딸, 손자들에게 물려줄 나라다. 그래서 ‘우리나라’라고 부르는 것이다. 바로 그 나라가 걱정이다. 사회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 산다. 노원구에 출마한 나꼼수 진행자 같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국민의 대표자의 자리로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를 지지하기 위해 수천 명이 시청 앞으로 모여든다. 수백만 명이 그들이 만드는 인터넷 방송을 방문하고 있다. 그 조회수가 그들을 인기인으로 만들었다. 인기는 표가 된다. 정치는 표를 원하니 후보가 된 것이다. 그 인기의 실체는 무엇인가. 병든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일탈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다. 우리 민주주의가 이렇게 막장까지 다다랐다는 증거다.
그들을 감싸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더욱 놀랍다. 서울대 교수, 인기 소설가, 판사, 야당의 수뇌급 인사들…. 스스로 진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진보의 신념은 무엇인가. 이성에 대한 믿음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교육과 계몽을 통해 완전한 인간,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역사의 진전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참담한 일들은 역사가 진보했기 때문인가? 아니, 진보가 너무 나가 썩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가 아니라 퇴영이다. 밖에서는 우리를 존경의 눈으로 보아준다. 경제도 잘하고 민주주의도 잘하는 모범국가라고 … 정말 그런가.
우리의 정치는 지금 어디 와 있는가. 민주주의는 이미 타락해 포퓰리즘 늪에 빠져 있다. 정치인들은 누구도 미래를 말하고 있지 않다. 현재의 달콤함과 편리함만을 부추기고 있다. 경제는 어떤가? 가진 자는 더 탐욕을 부리고, 없는 자는 시기와 질투에 매여 있다. 자기 노력으로 잘살려 하기보다는 남이 가진 것을 나누기만을 바라고 있다. 독립심보다 의타심이 팽배하다. 윤리는 어떤가? 이 나라에서 정중함과 예의 바름은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저속함과 뻔뻔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반듯한 사람은 왕따가 되고 삐딱하게 꼬인 인간은 박수를 받는다. 이런 정신으로 건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는가? 역사에서 그런 예는 없다. 로마의 몰락은 로마 시민의 타락에서, 유럽의 쇠퇴는 이성을 따라가던 유럽정신의 쇠퇴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른들이 밭에 일하러 간 사이에 동네 아이들은 요술피리 소리에 홀려 그들을 쫓아갔다. 우리 기성세대가 물질의 풍요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간 사이에 우리 아이들의 영혼은 엉뚱한 사람들이 빼앗아 갔다. 피리 소리에 홀린 아이들이 돌아오도록 경성(警醒)의 나팔을 불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그 나팔 소리가 울려야 한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존심의 문제다. 국민을 얼마나 얕보았으면 이런 인물을 공천할 수 있는가.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인간들을 대표자로 뽑을 수 있는가. 국민이 어리석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조차 못한다면 우리는 정말 미래가 없는 나라가 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나라의 구석구석에서, 각 가정에서부터 각성이 일어나야 한다. 이 사태의 책임은 요술피리를 쫓아간 아이들에게 있기보다는 그들을 방치한 어른들에게 있다. 가정은 무엇을 했으며, 학교는 무엇을 가르쳤으며, 종교는 무엇을 했는가. 문제의 장본인이 성직자의 아들이라는 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의 모습으로는 젊은이들을 감동시킬 수 없다. 기득권을 무기로 윽박지른다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삶의 모범만이 향기가 나는 법이다. 그런 진정성만이 설득력을 가진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젊은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한 시민이 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자유와 참여가 소중한 만큼 책임과 의무를 함께 져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야 한다. 민주주의가 다수결로 결정된다고 해서 다중의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시민이 다중의 일원으로 묻혀버릴 때 우중(愚衆)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민이다’라는 것에 긍지를 갖게 만들어야 한다.
모든 일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작은 시내가 모여 강을 이루듯이 건강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야 건전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건강한 한 사람이 중요하다. 결국 민주주의도 한 사람에게 달렸다는 얘기다. 내 한 표가 중요하다는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들을 감싸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더욱 놀랍다. 서울대 교수, 인기 소설가, 판사, 야당의 수뇌급 인사들…. 스스로 진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진보의 신념은 무엇인가. 이성에 대한 믿음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교육과 계몽을 통해 완전한 인간,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역사의 진전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참담한 일들은 역사가 진보했기 때문인가? 아니, 진보가 너무 나가 썩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가 아니라 퇴영이다. 밖에서는 우리를 존경의 눈으로 보아준다. 경제도 잘하고 민주주의도 잘하는 모범국가라고 … 정말 그런가.
우리의 정치는 지금 어디 와 있는가. 민주주의는 이미 타락해 포퓰리즘 늪에 빠져 있다. 정치인들은 누구도 미래를 말하고 있지 않다. 현재의 달콤함과 편리함만을 부추기고 있다. 경제는 어떤가? 가진 자는 더 탐욕을 부리고, 없는 자는 시기와 질투에 매여 있다. 자기 노력으로 잘살려 하기보다는 남이 가진 것을 나누기만을 바라고 있다. 독립심보다 의타심이 팽배하다. 윤리는 어떤가? 이 나라에서 정중함과 예의 바름은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저속함과 뻔뻔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반듯한 사람은 왕따가 되고 삐딱하게 꼬인 인간은 박수를 받는다. 이런 정신으로 건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는가? 역사에서 그런 예는 없다. 로마의 몰락은 로마 시민의 타락에서, 유럽의 쇠퇴는 이성을 따라가던 유럽정신의 쇠퇴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른들이 밭에 일하러 간 사이에 동네 아이들은 요술피리 소리에 홀려 그들을 쫓아갔다. 우리 기성세대가 물질의 풍요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간 사이에 우리 아이들의 영혼은 엉뚱한 사람들이 빼앗아 갔다. 피리 소리에 홀린 아이들이 돌아오도록 경성(警醒)의 나팔을 불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그 나팔 소리가 울려야 한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존심의 문제다. 국민을 얼마나 얕보았으면 이런 인물을 공천할 수 있는가.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인간들을 대표자로 뽑을 수 있는가. 국민이 어리석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조차 못한다면 우리는 정말 미래가 없는 나라가 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나라의 구석구석에서, 각 가정에서부터 각성이 일어나야 한다. 이 사태의 책임은 요술피리를 쫓아간 아이들에게 있기보다는 그들을 방치한 어른들에게 있다. 가정은 무엇을 했으며, 학교는 무엇을 가르쳤으며, 종교는 무엇을 했는가. 문제의 장본인이 성직자의 아들이라는 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의 모습으로는 젊은이들을 감동시킬 수 없다. 기득권을 무기로 윽박지른다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삶의 모범만이 향기가 나는 법이다. 그런 진정성만이 설득력을 가진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젊은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한 시민이 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자유와 참여가 소중한 만큼 책임과 의무를 함께 져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야 한다. 민주주의가 다수결로 결정된다고 해서 다중의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시민이 다중의 일원으로 묻혀버릴 때 우중(愚衆)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민이다’라는 것에 긍지를 갖게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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