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칼럼/5.19] 한국, 그리스를 우습게 볼 처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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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449회 작성일 2012-05-21 09:33본문
나라 부도 위기 걱정은커녕 \'빚 안 갚겠다\'는 그리스 국민… 긴축 거부도 당연하게 여겨
외환위기 두 번 겪은 우리 1997년의 5배로 나라빚 늘어 언제 그리스처럼 될지 몰라
\"금 모으기 캠페인도 안하나.\"
무너지는 그리스를 보며 한국인들만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미국·대만의 언론도 그리스 국민을 그렇게 비아냥거렸다. 우리는 15년 전 외환위기 때 21억7000만달러어치의 금을 모았다. 부도 수표를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지만 세계인을 감동시켰다고 뻐기고 있다.
지금 아테네 거리에서 들리는 구호는 한국 IMF 위기 때와는 다르다. \"그리스는 빚이 없다.\" 외채(外債)의 존재를 아예 부정한다. \"빚이 있어도 갚지 않는다.\" 상환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외채를 단 한 푼도 떼어먹지 않았던 한국과는 정반대 발상이다. \"돈은 정치인·은행가·자본가가 갖다 쓴 것이다.\" 외채를 들여다 즐긴 것은 권력 계층이고 밑바닥 국민은 덕 본 게 없다고 펄쩍 뛴다.
국가가 부도(不渡)난다고 걱정해도 파업과 데모는 그치지 않는다. 구제금융을 끊겠다고 압박해도 긴축 정책에는 결사반대한다. 1832년 독립 이후 벌써 6번째 국가 파산 상태다. 180년 동안 줄곧 빚더미에 짓눌려 지냈다. 하지만 그리스는 지도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그리스 국민도 멸종되지 않았다.
국가 부채에 대한 유럽인의 생각은 한국인과는 딴판이다. 나라의 빚은 통치자가 부담할 몫이라는 인식이 유럽 역사를 지배해왔다. 왕과 귀족들이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을 하려고 빚을 졌다면 그 빚은 왕과 귀족들이 갚아야 했다. 당대(當代)의 왕이 진 빚은 다음 왕에게 넘겨지지 않고 채무상환 의무는 말소됐다.
근대 시민국가가 들어서면서 많은 것이 달라지긴 했지만, 빚 갚으라는 독촉에 몰려 나라가 벼랑 끝에 서게 되면 유럽인들은 그리스 국민처럼 원초적인 반발을 한다. 그들 눈에는 통치자, 즉 집권 정치세력이 갖다 쓴 외채를 국민들이 금을 모아 갚는 모습이 기적 같은 일로 보일 것이다.
외채 상환에 대한 의무감도 우리와는 다르다. 채무자가 못 갚겠다고 나자빠지면 채권자는 탕감해줘야 한다. 그들은 채무자가 탕감받는 것을 당연한 권리처럼 여긴다.
유럽에서는 왕의 취임식 때면 대사면(大赦免)을 하고 그때마다 감옥 문을 열고 부채를 탕감해줬다. 가톨릭 교회가 50년마다 \'주빌리(Jubilee·희년·禧年)\'라는 기념 이벤트를 갖고 빈곤층의 빚더미를 털어주는 전통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부채 탕감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짐작할 것이다. 유럽 은행들이 신속하게 그리스 외채를 털어주고 구제금융을 제공한 것은 이런 전통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수순(手順)이다. 유럽에서 한국처럼 모든 외채를 마지막까지 갚는 나라는 좀체 찾기 힘들다.
그리스 유권자들이 긴축을 거부하는 것도 한국과는 전혀 다른 선택이다. 1997년 우리는 재벌개혁·노동개혁 등 구조조정안을 받아들였다. 금리는 30%까지 치솟고 집단 명퇴로 실업자가 넘쳤다. 그 쓰라린 고통을 견디고 살아난 후 세계가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눈은 달라졌다. 우리는 그 길만이 돌파구라고 믿고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이 시키는 대로 순종했다.
그리스는 한국이 갔던 길과 반대로 갈 모양이다. 프랑스도 \'긴축 정책이 외통수가 아니다\'는 대통령을 뽑았다. 빚 때문에 나라가 무너질 때마다 혁명적인 처방을 발명해냈던 유럽 역사를 믿는 것일까.
영국 중앙은행 제도는 숱한 전쟁으로 나라가 빚더미에 올라 있을 때 채권을 찍어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프랑스가 지폐(紙幣)를 발명한 계기도 재정위기였다. 프랑스 혁명 후 국가 부채를 갚으려고 인쇄한 것이 오늘날 지폐의 출발점이다. 이번 유럽 위기에서 이런 혁신적인 발명품이 나올지는 두고 볼 일이다.
2010년 현재 그리스의 1인당 GDP는 2만6631달러고, 한국은 2만757달러다. 이번 위기로 순위는 역전되겠지만 그리스가 우리와 다른 선택을 한다 해서 \"쟤들은 왜 저러나\"라고 깔보거나 우습게 볼 수는 없다. 그리스가 6번의 파산을 겪었던 180년 사이 우리는 왕조(王朝)를 끝내고 나라를 잃었다. 구호품으로 받은 강냉이 죽과 우유로 끼니를 때웠던 세월이 짧지 않았다. 신흥 개발국가로 버젓이 성장한 이후에도 1997년에 이어 2008년 외환위기의 쓴맛을 봤다.
이런 고비가 두 번에서 멈출 것 같지는 않다. 정권이 바뀌어도 집권세력은 빚내서 쓰기를 즐긴다. 1차 외환위기 때 80조원 수준이던 국가 부채가 지금은 그 5배로 팽창했다. 멍청한 집권자에게 속아서 몇 번 더 뜨거운 맛을 보고 나면 양순하게 금을 모으던 국민도 그리스화(化)할 것이다. \"우리는 빚이 없다\"고 외치며 나자빠질 날이 금방 닥칠 수 있다. 우리 위정자는 남의 나라 걱정할 처지가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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