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5.9] 김용민이 막은 ‘2013년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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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731회 작성일 2012-05-09 09:05본문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진보의 ‘맨얼굴’ 막말과 從北
백 교수는 4·11총선에 앞서 “2013년 체제를 제대로 하느냐 마느냐는 총선에서 판가름 난다”고 단언했다. 일의 순서로 보아 체제 변혁을 위해서는 국회를 장악하는 일이 먼저라고 본 것이다. 백 교수는 스스로 ‘희망 2013 승리 2012 원탁회의’라는 원로 모임을 만들어 진보 진영을 독려하고 야권연대를 성사시켰다. 하지만 총선에서 야권이 패배하자 백 교수는 말을 바꿨다. 그는 총선 이후 한 인터뷰에서 “총선에서 졌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면서 “대선에서 야권이 승리한다면 어떤 대통령이 나오느냐에 따라 ‘2013년 체제’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야권연대의 한 축인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에서 부정이 드러난 이후 ‘2013년 체제’는 현실로부터 더 멀어지고 있다. 이번 사건을 통해 국민은 그동안 ‘음지(陰地) 식물’로 존재해 왔던 진보 세력의 ‘맨얼굴’을 목격했다. 보수 진영보다는 도덕적이고 공공의 이익에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오히려 상대방에게 덮어씌우는가 하면 당파적 이익에 매달려 국민은 안중에 없었다. ‘2013년 체제’는 이들과 민주통합당이 야권연대를 이룬 뒤 권력을 잡아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국민이 실체를 모르면 몰라도 알고서야 지지할 리 없다.
‘2013년 체제’의 핵심은 남북 관계에 있다. 백 교수의 목표는 2000년 6·15공동선언 때 거론된 남북 연합이다. 남북한이 내정(內政) 국방 외교에서는 독자 권한을 갖고 협력하면서 통일 문제를 풀어 나간다는 내용이다. 그의 담론은 이번 총선에서 개인적인 희망사항에 머물지 않았다. 민주당과 통진당이 올해 3월 야권연대를 이루면서 발표한 합의문에 ‘6·15공동선언의 이행을 담보하는 입법조치를 추진한다’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이행을 담보하는 입법조치’는 진보 진영이 국회를 장악한 뒤 남북 연합을 구체적인 실행 단계로 옮기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환상 부채의식 넘어 공정한 평가를
공교롭게도 통진당의 경선 부정이 불거지면서 이들의 새로운 면모가 공개됐다. 김일성 사상을 추종했던 주사파 출신들이 주도한 통진당은 북한 TV에서 볼 수 있었던 ‘이름표 들기 투표’를 하고 있었고, 북한식 용어에 익숙해 있었다. 총선 때 야권연대 합의문에도 백 교수가 자주 역설하는 ‘평화’ ‘자주’라는 말이 여러 군데 들어 있다. 한미동맹 해체나 우리 스스로의 무장 해제를 암시하는 말이다. 심지어 ‘국가안보 문제에 시민 참여를 보장한다’는 구절도 있다. 매번 북한 편을 드는 종북(從北) 시민단체들이 국방안보 정책에 직접 개입하도록 하겠다는 의미다. 이런 세력이 남북 연합을 추진한다면 어떤 결과를 빚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현 시점에선 ‘2013년 체제’의 실현이 힘든 듯 보이지만 3개월 전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민주당의 지지율은 올해 1월 전당대회를 마친 뒤 급상승해 총선에서 민주당 단독으로 과반 이상 확보를 자신했다. 여기에 연대 관계인 통진당 의석까지 합치면 ‘2013년 체제’는 가시권 안에 들어 있었다. 백 교수는 “총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의 예봉을 꺾어놓으면 대선도 안심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민주당의 순항에 제동을 건 것은 ‘나꼼수’ 진행자이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김용민의 막말이었다. 총선 다음 날인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25.9%가 ‘후보자 선택에 가장 영향을 준 이슈’로 김용민의 막말 파문을 꼽았다. 지역적으로는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응답 비율이 높았다. 수도권에서 김용민 파문이 꽤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 새누리당이 수도권에서 크게 패배하긴 했지만 그나마 박빙 승부에서 전세를 뒤집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용민이 새누리당의 역전승에 기여했고, 결과적으로 ‘2013년 체제’의 작동을 멈추게 만든 셈이다.
‘막말’과 ‘종북’은 진보 진영의 자화상이다. 정책적 대안보다는 직설적인 입에 의존했다. ‘왕조 체제’ 북한을 무조건 따르는 세력도 여전하다. 언젠가는 스스로의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보의 베일이 벗겨지면서 진보에 대한 막연한 환상, 과거 민주화 과정에서 국민이 가졌던 부채의식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진보 진영에겐 앞으로 엄정한 평가가 기다리고 있다. 위험한 ‘2013년 체제’를 일단 막은 것은 이번 총선의 현명한 선택으로 기억될 것이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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