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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칼럼/7.4] 아펜젤러를 떠올리게 하는 종교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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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7,792회 작성일 2012-07-04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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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미국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와 호러스 언더우드로부터 시작된다. 이들이 1885년 4월 5일 같은 배를 타고 조선 제물포 항구에 도착했을 때 아펜젤러의 나이는 27세, 언더우드는 26세에 불과했다. 두 사람은 이 땅에 최초의 선교사로서 개신교의 씨앗을 뿌렸고,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해 한국 근대화에 기여한 공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젊고 앳된 두 이방인이 어떤 배경, 어떤 사명감에서 조선에 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소개된 적이 없었다.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의문이 풀렸다. 아펜젤러의 모교인 미국 드루 신학대학원의 모리스 데이비스 교수는 “당시 미국 상황과 직결돼 있다”며 명쾌한 해답을 제공했다. 19세기 후반 미국 경제는 급속히 성장했다. 아펜젤러가 소속된 미국 감리교 역시 크게 팽창했다. 1790년 6만 명이던 미국 감리교 신자는 아펜젤러가 조선으로 떠날 무렵 260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미국 북부와 남부가 벌인 남북전쟁으로 개신교단은 분열됐다. 개신교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자연스럽게 해외 선교에 눈을 돌렸다. 부유한 신자들은 기꺼이 선교 비용을 지원했다. 마침 1882년 미국과 조선 사이에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아펜젤러 같은 젊은이들이 바다 멀리 조선으로 향했던 것이다.



풍족해지면서 타락해 위기 자초









그로부터 100여 년 뒤 한국 개신교가 미국이 걸었던 길을 따라간 것은 흥미롭다. 국내 개신교 신자는 1950년 60만 명에서 2005년 861만 명으로 급증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개신교 교세도 커졌다. 해외 선교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국가로 자리 잡았다. 1980년 한국 개신교가 내보낸 해외 선교사는 100명에 불과했으나 올해 초 현재 169개국에 2만3331명이 나가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미국의 해외 선교사 규모는 4만2000명에 이르지만 계속 줄어드는데 한국은 늘고 있어 조만간 한국이 세계 1위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러나 개신교를 포함한 한국 종교계는 중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선진국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 중 하나가 종교 이탈이다. 유럽에서 전체 인구 가운데 기독교인 비율은 1900년 95%에서 2000년 84%로 감소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을 느끼면 종교에 대한 갈망이 줄어든다. 한국 역시 종교 신자가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는 종교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개신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회 세습이나 불교계에서 일어난 스님 도박 사건은 종교계의 재정이 넉넉해지면서 생기는 일이다. 한 교회가 보유한 재산이 1조 원이 넘고, 어떤 사찰은 한 해 수입이 100억 원에 이른다는 소식이 들린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교회와 사찰도 덩달아 몸집을 키웠다. 성직자들이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던 큰돈을 주무르며 세속인보다 한술 더 뜨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종교에 치명상을 가할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식어가고 있는 종교심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조선에 들어온 뒤 선교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고종이 이들에게 교육과 의료사업만 허용했기 때문이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언더우드는 연세대를, 이들보다 조금 늦게 조선에 도착한 메리 스크랜턴은 이화여대를 세웠다. 선교의 힘은 이곳에서 나왔다. 아펜젤러가 문을 연 배재학당에는 양반 계급의 젊은이들이 입학했다. 이들은 학교에 종을 데리고 나왔다. 시중을 받기 위해서였다. 아펜젤러는 “교육은 학교에 종을 데리고 오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따끔하게 나무랐다. 가난한 학생에게는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등록금을 벌면서 공부하도록 배려했다. 조선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이들이 세운 서양식 병원은 돈이 없어 한의원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성심껏 보살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고종은 독살 위협에 시달리며 음식조차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국 선교사들이 가져오는 음식만큼은 신뢰했다. 불안한 밤이면 선교사들을 궁궐로 불러 같은 방에 있게 했다.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전전긍긍하던 조선 조정도 이들에 대해서는 상당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아펜젤러는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왔다”고 말했고 언행일치를 보였다.



섬김의 진정성 되찾고 행동할 때



그는 성경 번역 사업을 위해 배를 타고 가다가 서해 어청도 앞바다에서 충돌 사고로 순교한다. 비록 ‘개신교 선교’를 목표로 조선에 왔지만 이들의 행동에는 다른 이를 섬긴다는 진정성이 담겨 있었다. 이를 통해 개신교는 단기간에 한국 최대의 종교가 되는 기적을 이뤘다. 교회 세습과 스님 도박 사건에 이어 성직자와 종교단체가 세금을 내지 않는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한국 종교계가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아펜젤러가 가졌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야 한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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