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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영 칼럼/9.22] 박근혜·문재인·안철수의 경제학 학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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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9,030회 작성일 2012-09-2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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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후보 모두 세계경제 불황엔 위기의식 얇고 가벼워 보여…

\'경제 민주화\' \'일자리 위한 성장\' \'복지\' 내세우는 것도 똑같아

공공·노동 부문 개혁엔 시큰둥… 경기 대책 없인 장기 불황 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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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img_caption.jpg\" 송희영 논설주간


연설은 짧은 시간 내에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하는 장르다. 선거를 앞두고 급조된 정치인의 저서에는 누군가가 보조개를 넣어 웃는 얼굴로 성형을 해놓은 흔적이 잔뜩 담겼지만, 연설에는 대선 후보가 무엇을 중시하고 무엇을 버렸는지 측정할 만한 콘텐츠가 압축돼 있다.



대선 길목에서 박근혜 후보의 연설 중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은 지난 7월 10일의 대선 출정식 연설이었다. 새누리당 내부 경선은 통과 절차였기 때문에 그는 출정식 연설에 정성을 쏟았을 것이다. 문재인 후보는 민주당 경선이 끝난 9월 16일의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 무게가 실렸다. 안철수 후보는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쏠렸던 19일의 출마선언문을 준비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투입했을 것이다.



박 후보는 출정 연설에서 \"원칙을 잃은 자본주의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세계경제를 진단했다. 문 후보는 후보 수락 연설에서 나라마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것은 \"시장만능주의와 성장지상주의가 빚어낸 결과\"라며 자본주의의 위기를 걱정했다. 안 후보는 한국 경제의 위기를 걱정하며 \"세계적인 장기 불황까지 겹쳐\"라는 수식어로 세계경제의 오늘을 묘사했다.



세 사람 모두 바깥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다고 보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라고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며 다른 사람의 견해를 빌리거나 지나가는 말처럼 짧게 언급해 위기의식이 얇고 가볍다는 인상을 주었다. 한국 경제는 지난 60여년 세계를 휩쓴 자유주의 물결, 시장경제의 파도에 잘 적응한 덕분에 지금의 자리에 서 있다. 우리처럼 대외 의존도가 높은 나라의 지도자에게 \'세계경제\' 과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학점도 A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과목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툴고 어색한 발음으로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을 외치고 OECD 가입을 서두르더니 1차 외환 위기를 불러왔다. 이명박 대통령도 취임 전부터 세계경제가 하강 추세였던 것을 무시하고 \'7% 고도 성장\' 전략을 내세웠다가 2차 외환 위기에 휩쓸려 갔다. 대통령이 세계경제 과목에서 낙제하면 국가 경제는 부도 위기로 몰리고 만다.



\'한국 경제\'라는 과목에선 박 후보가 경제 민주화를 1번으로 앞세웠고, 이어 일자리와 복지를 강조했다. 문 후보는 일자리를 먼저 꼽았고, 복지와 경제 민주화를 덧붙였다. 안 후보는 \"경제 민주화와 복지는 성장 동력과 결합하는 경제 혁신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박 후보가 경제 민주화를, 문 후보가 일자리를 앞세운 것은 상대방 진영의 토픽을 선점(先占)하려는 선거용 배열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세 사람의 경제철학은 경제 민주화, 복지, 일자리를 위한 성장이 핵심 골격으로 별 차이가 없다. 중산층 몰락, 빈부 격차, 전세금을 걱정하고 있는 것도 비슷하다. 우리 경제의 아픈 곳을 진단한 답안지가 같고 그 병을 치료할 처방전까지 똑같아 학점을 다르게 매길 수 없다.



큰 줄기가 같다 보니 세 후보가 내놓을 세부 경제정책은 크게 다를 수 없을 것이다. 세 후보의 정책 차이를 발견하려면 고성능 현미경이 필요할지 모른다. 경제정책에 관한 한 누가 멋진 포장지에 깔끔한 글씨로 쓰느냐에 따라 유권자가 매기는 점수가 달라질 뿐이다.



안 후보는 \"정치가 바뀌어야 우리의 삶이 바뀐다\" \"새로운 정치가 들어서야 민생(民生) 중심 경제가 들어선다\"고 했다. 20년 전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씨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의 발상과 엇비슷하다. 정치를 먼저 뜯어고쳐야 경제가 잘될 것이라는 접근법이다. 박 후보와 문 후보는 교육, 남북 평화, 정치 쇄신을 거론하면서도 경제를 앞세웠다. 박 후보는 경제 민주화, 일자리, 복지를 3대 핵심 과제로 못박았고, 문 후보는 다섯 개 국가 과제로 일자리, 복지, 재벌 개혁을 꼽은 후에야 새 정치와 남북 평화 공존을 제시했다.



세 후보는 재벌 개혁을 강조한 것에 비하면 공공 부문과 노동 부문의 개혁에는 관심이 없다. 외환 위기 이후 기업 부문과 금융 부문은 쓰라린 구조조정을 거친 덕분에 글로벌 기업과 대형 은행이 탄생했다. 그러나 공공 부문은 단 한번도 구조조정을 하지 않아 공공 부문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특권층으로 자리 잡았다. 노동 개혁마저 미뤄지는 바람에 비정규직이 대량 발생했던 것을 세 후보는 깡그리 잊어버린 모양이다.



불황이 장기화할 조짐이다. 새 대통령은 당선된 날부터 못 살겠다는 비명과 썩은 곳이 터지는 폭발음을 듣게 돼 있다. 경기 대책부터 서둘러야 할 벼랑 끝에 몰릴 것이다. 새 정권의 첫 대응이 실패하면 우리 경제는 장기 불황에 빠질 것이다. 청와대까지 불길이 번져오면 그때야 박 후보의 국민행복위원회, 문 후보의 일자리창출위원회, 안 후보의 새 정치 구상이 죄다 거추장스러운 호사(豪奢) 취미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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