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칼럼/12.11] 선거 스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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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9,456회 작성일 2012-12-11 09:13본문
이집트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이 다시 소란스럽다. 지난해 봄 독재자 무바라크를 내쫓는 재스민 혁명을 했지만 새로 뽑은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아랍의 봄’이 왔다고 들떴지만 다시 ‘아랍의 겨울’로 돌아가고 있다. 민주주의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선거가 일주일 남았다. 일주일 후면 누구든 대통령이 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누가 되든 우리에겐 이집트와 같은 소요와 불안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비록 지지했던 사람이 당선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 생활인이 될 것이다. 그런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나라는 그만큼 성장했다. 그럼에도 선거 날이 가까워올수록 스트레스가 늘어난다. ‘누가 되면 큰일 난다’ ‘누가 되면 나라가 거꾸로 가게 된다’라는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고 그런 말들로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나 바로 그런 말을 하는 쪽이 정말 위험하다고 믿어도 좋다.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두려움과 불안을 자극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란 반대쪽에 대해서도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들의 회고록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백악관에 들어간 지 3개월이 채 안 되어 ‘대통령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정말 없구나’ 하고 깨닫는다는 것이다. 우리 경우도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 후보들은 경쟁적으로 경제민주화, 복지를 외친다. 기업은 미운 털이 박혔다. 그러나 대통령이 아무리 경제를 흔들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우리 경제의 80%가 해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의 영향을 그만큼 크게 받는다. 우리는 이미 대통령 개인보다 제도의 힘이 더 큰 나라가 되었다. 국회가 있고, 언론이 있고, 기업이 있고, 노동조합이 있다. 그런 제도가 든든할수록 대통령이 누가 되든 나라는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민주주의란 본래 온건하며 점진적이다.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일수록 민주주의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민주주의는 선택이다. 왕정이나 전제정은 통치자를 선택할 수 없다. 백성은 그들 밑에서 지배를 당할 뿐이다. 민주주의는 나를 통치할 사람을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며, 동시에 한 사람의 가치를 가장 귀하게 받드는 제도다. 두 후보가 우연히 똑같은 수의 표를 받았다고 치자. 그리고 개봉치 않은 마지막 한 표가 남았다. 그 한 표가 정권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가 가난한 자이든, 무식한 자이든, 노인이든, 젊은이든 상관없다. 그 한 사람의 결정을 이의 없이 따라 주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 한 사람은 1000만분의 1, 1억분의 1이 아니다. 또 ‘국민’이라는 대명사를 붙여 도매금으로 취급해서도 안 된다. 한 사람이 바로 나라이고, 한 명이 모두인 것이다. 이 어찌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닌가.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나의 의지로 선택한 만큼 그에 대한 책임도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하려면 책임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들 때문’이라는 변명은 있을 수 없다. 속은 것도 내 책임이다. 그러니 민주주의만큼 냉엄한 제도도 없다. 선택하는 사람은 ‘나’이지만 오로지 나의 입맛, 감정, 선호만을 생각해선 안 된다. 나를 넘어선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뿐만 아니라 또 다른 수많은 ‘나’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시민의식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할까? 미래와 긍정의 정신이다. 한 나라의 존재는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실체다. 우리는 현재만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젊어서 땀 흘려야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있듯이 때로 현재를 희생할 수 있어야 바람직한 미래가 오는 것이다. 현재 있는 것을 나누기보다 미래를 위한 투자가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식 세대들의 앞날을 생각해야 한다. 포퓰리즘의 가장 큰 문제는 현재를 위해 미래를 희생시키는 데 있다. 또한 긍정의 마음을 가진 리더를 찾아야 한다. 발전의 힘은 부정에서가 아니라 긍정의 정신에서 나온다. 이 나라를 이만큼 끌어올린 힘은 바로 긍정의 정신이었다. 비판정신도 필요한 때가 있다. 그러나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마음이 지배하는 나라는 뒷걸음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을 누가 더 긍정의 정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역사는 도도히 흐르는 물길이다. 그 물길 가운데 바위가 있으면 물길은 잠시 멈춘다. 그러나 곧 바위를 휘돌아 자기 갈 길을 가는 법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역사는 가장 험난한 계곡에서 출발하여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대양을 향해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일류기업들, 한류 문화 등은 그 물길이 거침없음을 말해 주고 있다. 설혹 우리의 눈이 흐려져 대표자를 잘못 뽑는다 해도 그것이 잠시의 걸림돌이 될지언정 물길을 막지는 못한다. 걱정할 게 없다. 선거 스트레스야 물러가라.
미국 대통령들의 회고록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백악관에 들어간 지 3개월이 채 안 되어 ‘대통령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정말 없구나’ 하고 깨닫는다는 것이다. 우리 경우도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 후보들은 경쟁적으로 경제민주화, 복지를 외친다. 기업은 미운 털이 박혔다. 그러나 대통령이 아무리 경제를 흔들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우리 경제의 80%가 해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의 영향을 그만큼 크게 받는다. 우리는 이미 대통령 개인보다 제도의 힘이 더 큰 나라가 되었다. 국회가 있고, 언론이 있고, 기업이 있고, 노동조합이 있다. 그런 제도가 든든할수록 대통령이 누가 되든 나라는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민주주의란 본래 온건하며 점진적이다.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일수록 민주주의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민주주의는 선택이다. 왕정이나 전제정은 통치자를 선택할 수 없다. 백성은 그들 밑에서 지배를 당할 뿐이다. 민주주의는 나를 통치할 사람을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며, 동시에 한 사람의 가치를 가장 귀하게 받드는 제도다. 두 후보가 우연히 똑같은 수의 표를 받았다고 치자. 그리고 개봉치 않은 마지막 한 표가 남았다. 그 한 표가 정권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가 가난한 자이든, 무식한 자이든, 노인이든, 젊은이든 상관없다. 그 한 사람의 결정을 이의 없이 따라 주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 한 사람은 1000만분의 1, 1억분의 1이 아니다. 또 ‘국민’이라는 대명사를 붙여 도매금으로 취급해서도 안 된다. 한 사람이 바로 나라이고, 한 명이 모두인 것이다. 이 어찌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닌가.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나의 의지로 선택한 만큼 그에 대한 책임도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하려면 책임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들 때문’이라는 변명은 있을 수 없다. 속은 것도 내 책임이다. 그러니 민주주의만큼 냉엄한 제도도 없다. 선택하는 사람은 ‘나’이지만 오로지 나의 입맛, 감정, 선호만을 생각해선 안 된다. 나를 넘어선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뿐만 아니라 또 다른 수많은 ‘나’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시민의식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할까? 미래와 긍정의 정신이다. 한 나라의 존재는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실체다. 우리는 현재만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젊어서 땀 흘려야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있듯이 때로 현재를 희생할 수 있어야 바람직한 미래가 오는 것이다. 현재 있는 것을 나누기보다 미래를 위한 투자가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식 세대들의 앞날을 생각해야 한다. 포퓰리즘의 가장 큰 문제는 현재를 위해 미래를 희생시키는 데 있다. 또한 긍정의 마음을 가진 리더를 찾아야 한다. 발전의 힘은 부정에서가 아니라 긍정의 정신에서 나온다. 이 나라를 이만큼 끌어올린 힘은 바로 긍정의 정신이었다. 비판정신도 필요한 때가 있다. 그러나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마음이 지배하는 나라는 뒷걸음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을 누가 더 긍정의 정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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