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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칼럼-김영희 한겨레 편집인] 대통령 한마디에 시스템이 무너지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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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67회 작성일 2023-06-2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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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수능 발언 파장 속에 21일 정부는 사교육 ‘이권 카르텔’ 사례와 학원의 허위 과장 광고 집중 단속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서울 대치동 학원가 모습. 사진은 지난 16일 서울 대치동 학원가 모습.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윤석열 대통령의 수능 발언 파장 속에 21일 정부는 사교육 ‘이권 카르텔’ 사례와 학원의 허위 과장 광고 집중 단속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서울 대치동 학원가 모습. 사진은 지난 16일 서울 대치동 학원가 모습.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김영희 | 편집인 

“이번엔 다들 수능 출제진에 포함되기 두려워하겠죠. 어떤 단어는 교과과정 안이고 어떤 건 아니고 이걸 따지기도 쉽지 않고…. 그걸 누가 판단하나요?” 한 유명 영어 강사는 통화에서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사실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15일 발언을 처음 접했을 땐 그리 유별나게 느끼지 않았다. ‘공교육 정상화’ ‘사교육비 절감’을 외치지 않은 정부가 역대 있었나. 교육과정평가원도 ‘교육과정 내에서 수능 출제’를 다짐해온 터다. 이런 기조를 꼭 실천하겠다는 뜻이라면 환영이다.


이후 전개는 모두가 알다시피다. 교육부 담당 국장 대기발령→평가원 감사→교육부 장관 사과와 ‘킬러문항’ 배제 발표→평가원장 사임이 숨가쁘게 진행됐다. 두 아이가 수능을 치른 지 꽤 세월이 흘렀지만, 일반적으로 6월 모의평가가 어렵고 9월이 좀 쉬웠다는 정도는 기억한다. 이번 결과는 28일 발표될 예정이고, 입시기관들의 가채점이 엇갈리긴 했어도 난도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어떤 과목의 어떤 문항이 문제냐는 기자들의 끈질긴 질문에 답을 못 하는 교육부 차관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검찰 시보 시절부터 입시 부정 수사를 맡은 전문가”(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 “나도 전문가지만 대통령에게 많이 배운다”(이주호 부총리) 같은 웃음코드도 있지만, 이 상황은 본질적으로 공포물에 가깝다.


정부와 <조선일보> 등은 ‘교육개혁’이자 ‘사교육 카르텔과의 싸움’이라 의미부여하려 애쓴다. 사교육업체 이권이 교육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것은 맞다. 개혁이란 때론 상식을 뛰어넘는 의지와 실행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 또한 맞다. 하지만 ‘좋아, 빠르게 가’가 필요한 일과 그래선 안 되는 일이 있다. 그걸 구분하는 게 국정 능력이다. 대한민국 입시제도 변화가 언제 그럴듯한 명분이 없어 실패했었나. 구체적인 근거와 대책 없이 “출제 기법의 고도화”만 되뇔 때, 신유형·준킬러문항 같은 불안 마케팅이 커진다는 건 옆집 학부모에게만 물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정녕 교육개혁을 바란다면 들여다볼 지점은 명확하다. 챗지피티와 인공지능 시대엔 창의성과 융합이 결정적이라고 하나같이 말하는데, 현실은 오지선다형 수능에서 얻은 소수점 이하 단위의 점수 차이가 인생을 결정한다는 듯 돌아간다. 킬러문항은 30년 된 수능의 한계와 이런 현실이 낳은 부산물일 뿐이다. 능력주의란 이름으로 학력 차별과 노동 천시가 이토록 일상화된 사회에서 아이들을 경쟁으로 내모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을 할 부모들이 얼마나 있을까. 모든 이들이 자녀 교육을 뒷받침할 지적 능력과 환경을 갖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자율형사립고·외국어고는 유지한 채 킬러문항을 없애 ‘교육 약자’를 위한다고 한다. 아무리 이해해보려 해도 내 능력치 밖 논리다.


지금 온통 관심은 수능 혼란과 전망에 가 있지만, 주목할 지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이번처럼 어떤 통로로 대통령한테 입력됐는지 알 수 없는 정보가 정책 발언으로 튀어나오는 일이 반복되면 사회의 리스크는 커질 수밖에 없다. 노동과 외교, 언론에 대한 대통령의 편향된 인식은 이유를 짐작이나 할 수 있다. 실제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도 적잖다. 그에 비하면 교육은 뜬금없다. 박순애 장관 사임으로 끝난 취학연령 앞당기기 전말은 아직도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대통령이 현실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얻고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면, 어떤 정책도 신뢰를 얻기 어려운 건 자명한 일이다.


공직사회, 나아가 사회 각계에 조금이라도 대통령에 어긋나면 ‘다친다’는 메시지가 확산되는 것도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모평 하나로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데 수능에 대해 작은 불만이라도 제기될 경우, 출제위원이나 기관에 검찰 압수수색이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판이다. 최근 현안에 의견을 내는 것에 대해 감사나 수사의 ‘두려움’을 실제 느끼는 학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늘었다. 정권퇴진 주장도 자유롭게 하는 세상 아니냐 할지 몰라도 중간지대의 분위기는 다르다. 곳곳에서 감지되는 ‘위축 효과’가 장기적으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번 사태에서 입시의 ‘4년 예고제’는 가볍게 무시됐고, 전문가들의 우려는 ‘이권 카르텔’ 정도로 치부돼 버렸다. 설사 문제가 있어도 제도와 시스템엔 역사와 맥락이 있는 법이다. 국가교육위원회,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수장에 논란 많은 인사를 앉혀놓길래 뭔가 뜻이 있는 줄 알았더니 숙의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교육개혁·노동개혁에서 이 기구들도 존재감은 제로다. 대통령 한마디에 각 분야 시스템이 무너지는 지금 상황을 아직은 코미디라 믿고 싶다. 이런 코미디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퇴행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게,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원문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968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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