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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칼럼-이중근 경향신문 논설주간] 법에 갇힌 한국 정치, 윤·이가 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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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56회 작성일 2022-09-07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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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0월 중순, 홍사덕 정무1장관이 노란 포스트잇 한 장을 손에 쥐고 정부종합청사 10층 총리실 기자실로 들어섰다. 홍 장관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대뜸, “정치권의 일을 검찰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입을 열었다. 1주일 전, 강삼재 신한국당 의원이 김대중(DJ) 국민회의 후보의 ‘670억 비자금’설을 제기한 데 이어 관련 계좌까지 공개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김영삼(YS) 정권의 정무장관이 야당 대선 후보의 비자금 의혹 사건 수사를 해서는 안 된다니! 홍 장관은 며칠 뒤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홍 장관은 한 공청회에 참석해 “여야가 비자금 문제에 정직하게 접근함으로써 검찰이 정치에 개입하는 사태를 막고, 선거를 통해 국민이 심판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자금 폭로를 중단하고 정책 대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 말이 과연 YS의 뜻일까 하는 생각과 함께 저런 주장이 관철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며칠 뒤 검찰 수사는 미뤄졌고, DJ는 39만표(1.6%포인트) 차로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를 물리쳤다. 과연 당시 검찰이 비자금 수사를 했다면, DJ 시대가 열렸을까?

이중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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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가 온통 법에 포획돼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검찰로부터 출두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야당은 현직 대통령을 고발했다. 내란이나 외환의 죄가 아니면 재임 중 대통령을 수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야당을 지키기 위해 맞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당은 어떤가. 지도부를 구성하는 당 내부의 일을 온전히 법원에 내맡긴 처지다. 정치의 근본적인 부분까지 법으로 재단되고 있다. 정치의 실종이다.

정치의 사법화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헌법재판소가 행정수도 이전을 막은 일이 20년이 다 되어간다. 그사이 선거구 획정 취소는 물론, 이라크 파병 등 외교안보에 대한 고도의 정책적 선택까지 헌재의 판단을 구한 바 있다. 4대강 사업도 법정에 섰다. 정치의 사법화가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고, 또 이것이 다 나쁘다고만 할 수도 없다. 정치가 결정해주지 못하는 일을 법원이 대신 하는 게 현실이다. 일정 부분 법치를 구현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지금 한국처럼 정치의 사법화가 극에 달한 경우는 없었다. 웬만한 정치인은 다 상대 당 또는 상대 진영 시민단체에 의해 고소·고발돼 있다. 전에는 선거가 끝나면 여야가 합의해 고소·고발 사건을 취하했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다. 대선이 끝난 뒤 후보가 수사를 받는 초유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뿐이 아니다. 한국은 지금 ‘정치의 사법화’에 ‘사법의 정치화’까지 겹쳤다. 검찰과 경찰이 노골적으로 정부 편에 서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문재인 정권에서 불법과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도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 그대로다. 윤 대통령은 “(수사는) 다 시스템에 따라 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 시스템은 누가 봐도 편파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검사나 판사는 법을 적용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이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게 못으로 보이듯, 그들에게는 법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습성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시민의 입장에서 결정해야 할 일까지 재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게다가 판사들이 공정하다는 보장도 없다. 법관들도 저마다의 정치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 대선 당시 홍사덕 장관의 ‘수사 자제’ 발언은 그냥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비자금 수사가 없어야 유권자들의 의사가 제대로 대선에 투영될 수 있다는 YS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홍사덕의 이런 성향은 훗날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정치 만능’이라는 착각에 빠져 섣부르게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다. 누구나 DJ나 YS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는 없다. 그러나 정치인이라면 법에 호소하기에 앞서, 정치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적어도 정치를 검찰이나 사법부에 예속시키지 않겠다는 홍사덕의 책임감이라도 견지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토론과 타협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모든 일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민주적 공론에 따라 결정하자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문제만 생기면 검찰로 법원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것은 자신에게 권한을 맡겨준 시민을 배신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정치권이 해야 할 당면 과제는 하나, 정치를 복원하는 것이다. 결국 윤 대통령이 이 대표와 영수회담을 통해 정치의 사법화 문제를 풀어야 한다. 어차피 모든 책임은 윤 대통령이 지는 것이다. 여건 탓을 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원문보기 :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907030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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