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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호] 언론계의 주 52시간 노동 ( 황상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한국일보 논설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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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093회 작성일 2018-06-30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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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호


언론계의 주 52시간 노동


황상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한국일보 논설실장


기자에겐 모든 게 기삿거리

‘서면 취재, 앉으면 기사 작성, 누우면 기획….’ 기자와 기자사회, 기자 업무의 특성을 이만큼 압축적으로 들려주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의미 그대로 기자는 잠자는 시간 빼고는 거의 모든 활동이 취재, 기사 작성과 연결돼 있다. 오죽하면 재벌 회장들에겐 돈벌이 사업 아이템으로 보이는 것도 기자들 눈에는 오직 기삿거리로밖에 비치지 않는다고 할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과거에는-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기자에게 일과 가정의 조화로운 양립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저 자나깨나 기사 생각뿐이었다. 아내가 전하는 옆집 이야기, 친구가 털어놓는 생활현장의 애환, 친척이 말하는 세상사 부조리 등등이 허투루 들리지 않고 모든 게 기삿거리로 보였다. 머릿속은 항상 ‘야마’ 잡기와 취재방법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했다. 하루 업무는 집에서 여러 조간신문을 보는 것으로 시작하고, 밤 늦은 시각 집에 들어와 마감뉴스를 보거나 출입처 당직자나 관계자에게 괜히 전화 한 통 걸어보는 것으로 끝났다.


언론계 업무문화·관행 변화 불가피

지금 생각해보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생활을 했을까 싶다. 하지만 실제로 모든 선후배, 동료 기자들이 그랬다. 민주주의, 자유, 정의, 공정, 평등 같은 큰 가치의 실현에 몰두하다 보니 알콩달콩한 가정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 나은 사회의 실현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와 신념은 휴일에도 가족을 등 뒤에 남겨놓아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무책임함과 미안함을 변호하고 변명하는 기제로 작동했다. 일과 휴식의 구분은 불가능했고, 구분지으려 하지도 않았으며, 회사와 가정의 공간적 구별은 무의미했다. 회사가 집이고, 출입처가 일터였으며, 일이 늘 우선이었다.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대형사건·사고 발생 현장이나 북미 정상회담 같은 대형 행사를 취재하게 되면 수면시간을 빼곤 일의 연속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뻗치기에, 끈기와 체력을 요구하는 추가 취재는 다반사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알 수 없는 사건의 돌발성은 늘 머리를 무겁게 누르고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그럼에도 과거나 지금이나 기자들이 기꺼이 그런 생활을 해냈고, 또 해내고 있는 것은 기자로서의 사명과 긍지 덕분이다. 권력을 감시·견제하고 비판하면서 약자와 빈자, 정의와 공정의 실현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가 없다면, 우리 사회의 올바른 변화를 견인하고 일조한다는 보람과 성취의 기쁨이 없다면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가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자들의 그런 일상이 종언을 고하고 있다. 7월 1일부터 언론계에 도 ‘주 52시간 노동’을 규정한 개정 근로기준법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이제 더 이상 취재와 기사 작성을 하고 싶어도 주 52시간을 넘기면 안 된다. 언론사 역시 52시간 이상 일을 시켜서도 안 된다. 기자들의 일상은 물론 기자라면 누구나 당연시해 온 언론계 업무 문화와 관행에 일대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노동시간 단축 방안 못찾고 갈팡질팡

노동에는 합당한 대가와 적절한 수준의 휴식이 보장되어야 한다. 휴식과 재충전 없이는 노동생산성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저녁이 있는 삶’ ‘휴식이 있는 삶’을 보장하려는 노동시간 단축 정책의 방향은 맞다고 본다. 좀 더 사회나 조직보다 개인의 삶과 가치를 중시하는 시대적 흐름 변화에 호응한다는 차원에서도 세계 최장 노동시간 국가의 오명은 빨리 지워야 한다.

그러나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대변화가 정착하기까지는 상당한 혼란과 시간투입이 불가피해 보인다. 언론계 역시 대응 방안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노동계는 인력 충원을 해결책으로 제시하지만 미디어산업 경영 환경과 언론사 인력 구조를 감안하면 단기간 내 급격한 인력 증원은 오히려 부작용이 큰 선택이 될 수 있다. 언론계의 경우 노동시간 단축이 근무형태의 근본적인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는 점이 문제의 복잡성을 더해준다.

출퇴근 시간을 어떻게 측정할지, 취재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봐야 하는지, 취재원과 의 식사나 술자리를 사적인 자리와 어떻게 구분하고 확인할지, 극단적으로는 취재나 기사 작성 도중 52시간이 초과되면 중단해야 하는 것인지, 담당 분야에서 야간 돌발상황이 발생했을 때 재택 취재나 기사 작성은 또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디테일의 악마’가 산적한 상황이다. 이런 복잡한 문제의 해결을 개별 언론사 경영진에만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언론단체는 물론 언론노조, 경영진과 기자들이 모두 종전 언론계 업무 문화와 관행을 뜯어고치기 위한 개선책 마련에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한다. 디테일까지는 아니더라도 큰 틀에서 기존의 취재 관행과 제도, 문화 전반에 걸쳐 기자들의 ‘저녁이 있는 삶’을 저해하는 요소를 정리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계기가 필요하다. 언론계는 지금 또한번의 격변기에 접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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