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호] 솔페리노 전투와 전쟁저널리즘 ( 김정훈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동아일보 편집국장 ) > 임원진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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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호] 솔페리노 전투와 전쟁저널리즘 ( 김정훈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동아일보 편집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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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308회 작성일 2018-12-28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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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호


솔페리노 전투와 전쟁저널리즘


김정훈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동아일보 편집국장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의 솔페리노는 웬만한 유럽 지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이곳에선 1859년 6월 24일 대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이탈리아 독립과 통일에 나선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빅토르 엠마뉴엘 2세와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연합군은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양측의 군대 20만명이 집결한지 불과 16시간의 전투로 무려 4만명의 사상자가 났을 정도로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연수 중이던 2008년 초 나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이곳을 가보았다. 밀라노에서 동쪽 베네치아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달리다 오른쪽으로 빠지면 솔페리노 가는 길이 나온다. 좁은 1차선 도로를 15분가량 달리면 사방으로 확 트인 동네가 나타나는데, 약간 고지대에 위치한 마을 광장 쪽으로 향하자 150여년 전의 전투로 여기저기 파괴된 흔적이 남아 있는 큰 대리석 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문을 통과해 카스텔로 광장에 이르자 멀리 가르다 호수까지 사방으로 확 트인 평원이 펼쳐졌다. 언덕 쪽으로 좁은 시골길을 100여m쯤 걸어 올라가니 과거의 대전투를 기념하는박물관으로 변신한 요새가 버티고 있었다.


솔페리노 전투는 이탈리아 통일에 전환점이 됐던 역사적인 전투였다. 빅토르 엠마뉴엘 2세는 이 전투의 승리를 발판삼아 1861년 이탈리아 통일을 이룩했다. 솔페리노 전투의 의미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전투 당시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몇명의 목격자들에 의해 인류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사건으로 바뀌었다. 참혹한 전투 현장은 앙리 뒤낭에 의해 기록됐고, 나중에 적십자 운동의 출범과 제네바협정의 기반이 됐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전투는 언론사에 있어서도 의미가 적지 않다. 당시의 전투 현장에는 뉴욕타임스의 편집장이자 공동 설립자인 헨리 J. 레이몬드(1820~1869)가 ‘종군 특파원’으로 와 있었다. 1851년 창간된 뉴욕타임스는 그때까지 전쟁을 직접 취재해 보도한 적이 없었다. 크림전쟁(1853~1856)에 관해  도한 적이 있었지만, 미국인들에게 별관심사가 아니었다. 반면 이탈리아 북부에서 작된 전쟁은 미국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 뉴잉글랜드 지역에는 이탈리아에서 대서양을 건너온 이민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859년 4월 29일 오스트리아군이  에몬테-사르데냐 왕국과의 경계선인 티치노 강을 건넌 것을 기화로 전쟁이 시작되자 레이몬드는 직접 전쟁 현장을 취재하기로 결심했다.


이때쯤에는 텔레그래프가 보편화돼 유럽과 미국에서 벌어지던 여러 전쟁의 현장이 신문을 통해 보도되고 있었다. 일례로 영국 더타임스의 윌리엄 하워드 러셀 기자는 크림전쟁의 진행 상황을 생생하게 속보로 전해 명성을 얻고 있었다. 러셀은 전쟁 현장 보도의 전범이 됐고, 레이몬드 역시 러셀로부터 자극을 받았다. 증기선 아라고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넌 레이몬드 일행은 솔페리노 전투 닷새 전인 6월 20일 이탈리아 북부 도시인 마젠타에 도착했다. 전투가 시작됐다는 소식을 접하자 레이몬드는 솔페리노 인근 몬테키아로에 있는 요새 꼭대기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장면을 지켜봤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구체적인 전투장면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전투가 끝난 뒤 시체들로 뒤덮인 솔페리노 언덕과 신음 소리를 내며 죽어가는 부상병들의 참혹한 현장을 취재할 수 있었다.


전화나 팩시밀리 같은 전송 수단이 없었기에 레이몬드가 우편으로 뉴욕에 보낸 취재기는 전쟁 종료 직후인 7월 12일에야 뉴욕타임스에 게재됐다. 이 기사는 솔페리노 전투의 참상을 널리 알렸고, 나중에 ‘전쟁저널리즘’의 모범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일간신문이 서유럽과 미국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던 19세기 중반, 일반 대중에게 생생한 전쟁의 참상을 널리 알린 전쟁보도는 신문들이 발행부수를 크게 늘리는 계기가 됐다. 지식 엘리트층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신문을 앞 다퉈 구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토머스 제퍼슨이 남긴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랐다’는 명언에 빗댄 ‘신문은 전쟁의 피를 먹고 성장했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북핵 위기로 한반도에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우리 언론은 만의 하나 전쟁이 난다면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 제3자로 관전하는 먼 나라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상황이 평화정착으로 갈지, 불안한 대치가 계속될지 알 수 없지만 10년 전 솔페리노 방문 때의 비망록을 다시 꺼내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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