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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호] “계란이라도 사 들고 와야 했는데…” ( 박래용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경향신문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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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063회 작성일 2017-10-31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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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호


“계란이라도 사 들고 와야 했는데…”


박래용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경향신문 논설위원


상대방 얘기만 잘 들어줘도 ‘굿’

편집국장에서 물러나 논설위원으로 일한 지 꼭 1년이 됐다. 2년여 스트레스에 짓눌려 살다 책도 읽고, 산책도 다니며 지내니 비로소 사람답게 사는 것 같다. 편집국장을 맡은 직후 외부 인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마다 “초짜 국장에게 해줄 조언이 뭐 없느냐”고 물었다. 여러 얘기를 종합하니 대략 세 가지로 압축됐다.


첫째 ‘전화를 모두 받아줄 것’.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지든, 안 받아들여지든 상관없이 일단 얘기는 들어주라는 것이었다. 그러기는커녕 전화조차 안 받아주는 국장은 제일 미운 놈이라고 했다. 둘째 ‘뭐라도 표시를 내줄 것’. 홍보하는 사람 입장에선 초판 제목이나 기사를 조금이라도 손질해주면 그걸로 회사에선 밥값은 한 셈이니면 좀 세워주라는 것이다. 요는 다음날 아침 ‘비포(before)’와 ‘애프터(after)’를 만들어 윗사람에게 보고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높은 사람 만날 때 홍보임원 칭찬해 줄 것’. 사장·부사장 만날 때는 반드시 홍보상무 등이 배석하게 마련이다. 그때 지나가는 말로라도 아무개 상무 참 일 잘한다고 한마디 해주면 그 사람은 절대 그 말빚을 잊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대체로 틀린 얘기도, 어려운 얘기도 아니어서 국장 재임 중 세 가지를 이행하려 노력했다. 오는 전화를 받는 데서 나아가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으면 반드시 콜백을 했다. 걸어오는 전화의 상대가 허물없는 사이라면 “감사합니다. 경향신문 편집국장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상대를 놀려먹기도 했다. 한국일보 출신 코오롱그룹의 김승일 전무는 “현존하는 편집국장중 가장 친절한 국장”이라고 거꾸로 나를 놀렸다.


초판 제목이나 기사를 수정하는 건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먼저 담당 기자와 데스크에게 충분히 설명토록 하고, 그들이 손질에 동의해야 가능하다는 원칙을 세웠다. 일선 기자들은 내용보다 저쪽에서 연락이 와서 기사에 손을 댔다는 것에 자존심을 상해 하는 것 같았다. 기자들에겐 “흰말 궁둥이나 백마 엉덩이나 같은 뜻 아닌가”라고 기사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좀더 유연해질 것을 당부했다. 상대의 설명을 듣다보면 팩트가 틀렸던 부분을 바로잡아 기사의 완성도를 높이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데스크·기자들도 비슷한 생각이어서 큰 어려움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부하 직원 칭찬은 가장 효과가 있었다. 한 번은 어느 기업의 사장과 오찬이 잡힌적이 있었는데, 약속을 주고받은 홍보상무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점심 자리에서 사장에게 “OOO 상무는 내가 본 홍보쟁이 중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 언론계에서도 평이 좋다”고 쪼찡을 했다. 사장은 “그러냐”고 웃고 넘겼지만, 그 상무는 얼굴이 뻘개져 있었다. 자리가 파한뒤 그 상무는 내 손을 잡고 연신 “감사합니다”고 했다. 이도 자주 써보니 요령이 생겨서 갈수록 스킬이 화려해졌다. 언론사 출신 홍보임원을 두고서는 “우리 언론계로서는 큰 별을 잃었다. 귀하게 쓰시라”고 했다. 그런 말 듣고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다보니 타사 출신 선·후배만 칭찬할 게 아니라 우리 식구부터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향신문에서 기업·관가로 옮긴 후배들도 적지 않다. 후배들이 근무하는 곳의 높은 사람을 만날 때는 꼭 거기 있는 아무개 씨를 데리고 나와 달라고했다. 그리고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지갑에서 1만 원을 꺼내 높은 분의 손을 잡고 쥐어주었다. “우리 OOO이 잘 부탁드립니다. 계란 한 꾸러미라도 들고 와야 했는데 빈 손으로 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기업 간부든 고위 관료든 박장대소를 하며 좋아했다. 어떤 이는 “기자에게 돈 받아보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낯선 직장에서 일하는 후배들에게 친정은 항상 든든한 언덕이 돼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퇴직한 선배들에 대해서도 현직 후배들이 달라붙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친정이 밀고 끌어주는 게 당연시되는 조직문화를 만들자고 당부했다.


세상이 여러모로 각박해졌다고 한다. 타사 선배들을 어렵게 알고, 타사 후배들과도 격의없이 지냈던 시절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타사 선·후배들에게서 배운게 더 많았던 것 같다. 아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란다고 한다. 세태 탓만 할 게 아니다. 내가 먼저 하면 후배들도 느끼는 바가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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