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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호] 선물로 받은 부채 두 자루 ( 김상수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강원도민일보 논설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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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075회 작성일 2017-08-31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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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호


선물로 받은 부채 두 자루


김상수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강원도민일보 논설실장


더위에 지친 심신 가볍게 해 준 뜻밖의 선물

무더위가 막바지를 향해 가던 지난 여름 의외의 선물 두 개를 받았다. 열흘 남짓 간격으로 연이어 받아든 것은 공교롭게도 둘 다 부채였다. 추석을 얼마 앞둔 지금 선물이라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요즘엔 따뜻한 정이 느껴지기보다는 기피의 대상처럼 여겨져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김영란법이다 뭐다 해서 식사와 선물, 부조금의 상한선을 긋고 뭐는 되고 뭐는 안 되고 까다롭고 복잡하기가 짝이 없다. 정을 나누는 미풍(美風)이 아니라 까딱하면 망신떨고 낭패를 보기가 십상인 것이 작금의 세태다. 이번 두 번의 선물은 달랐다. 받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고 주는 이 역시 그랬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는 회사의 윗분이 준 것인데, 어느날 불쑥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 부채 한자루를 건넸다. 직장의 상하관계가 아무리 좋아도 어려운 끝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건네진 부채 한 자루는 그런 약간의 긴장 같은 것마저 걷어냈다. 부채라고 하면 여름 한 철 지내며 땀을 식히는 데 제격이 아닌가. 손에 딱 잡히면서 가볍고 만만한 느낌이 좋았다. 질감이 그러하였지만 선물이 주는 무거운 느낌이 없다는 게 금상첨화였다.


부채는 예부터 선비들이 지녔던 필수품이다. 늘 가까이 두고 필요할 때 바람을 불러들이고 허전한 손끝을 채워 주는 액세서리이기도 하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패션의 화룡점정이라고 해도 좋겠다. 지금이야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동양문화권으로 여행을 다녀온 이들의 주요 선물 품목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우선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고 누구에게 건네도 흠이 잡힐 데가 없는 것이 자랑이다. 얼른 접이식 부채살을 펼쳐들자 아치형 모양을 따라 쓰인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다섯 음절의‘至誠貫鐵石’(지성관철석)이라는 문장이었다. 정성을 다하면 쇠와 바위도 뚫을 수 있다는 뜻이다. 직접 쓴 이 짧은 어휘가 작은 선물의 가치를 더해주었다. 자구(字句)를 써내려갈 때 받는 사람과의 궁합을 생각했을 것이다. 적당한 글귀를 찾고 먹을 묻혀 부채에 생명을 불어넣는 동안 주고받는 이 사이의 교감이 이뤄지는 셈이다. 정성을 모으면 하늘도 움직인다(至誠感天)하고, 정성을 다하면 신과도 같다(至誠如神)라고도 한다. 편법과 졸속이 판치고 건성건성 공사(公私) 구분을 못하면서 일어나는 불상사가 얼마나 많은가. 개인도 조직도 국가도 지금 가장 결핍된 것이 바로‘지성(至誠)’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 하나의 부채는 대학의 한 작은 공부모임이 끝나는 날 받았다. 몇 개월 간의 일정을 끝내면서 중년의 선생은 부채 한 자루씩을 돌렸다. 열 대여섯 명 정도 되는 도반(道伴)들에게 각양각색의 부채를 선물한 것이다. 누구는 결석이 없었고, 누구는 뭘 잘했고 하는 식의 가벼운 치사(致詞)도 곁들여졌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티끌만큼의 저어함도 없었다. 예의 각각의 부

채마다에는 그가 정성들여 쓴 필적이 아로 새겨져 있었다. ‘讀萬券書 行萬里路’(독만권서 행만리로)라는 대구(對句)였다.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를 여행하라는 얘기다. 한 생애는 결국 독서와 여행에 의해 좌우된다고 했던가.


잠시나마 배움을 통해 인연을 맺었던 사이에 주고받을 수 있는 징표로서 이보다 좋을 수는 없겠다. 널리 세상의 문물을 겪어보고 여러 사람을 만나 우정을 나누는 것(交萬人友)이 삶의 진수가 아닐까. 이런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키워가는 것이 곧 인생역정이라고 할 것이다. 저마다 삶의 무늬가 이렇게 결정돼 간다. 한 학기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만남의 의미와 내용이 부채 한 폭에 담박(淡泊)하게 요약돼 있었다. 그 역시 이 말을 고르고 한 자 한 자 붓을 눌러가는 동안 받을 사람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저 감정 없이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과는 다른 것이다. 이럴 때 부채는 부채 그 이상의 것이 된다.


‘남에게 물건을 줄 때는 와서 가져가라 하지 않고(賜人者 不曰來取), 남에게 물건을 주는 자는 좋아하는 것을 묻지 않는다(與人者 不問其所欲)’라는 말이 <예기(禮記)>에 전한다. 뭘 주고받는 데는 다 이런 마음을 먼저 담았던 것이다. 어쩌다 정이 묻어나는 선물의 본뜻이 사라지고 불편하고 거북스러운 것의 상징이 돼버렸나 싶다. 유난히 무더웠던 2017년 여름을 보내며 받아든 뜻밖의 선물이 더위에 지친 심신을 한결 가볍게 해 주었다. 두 개의 부채에 담긴 각각의 메시지가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이른 내 삶의 태도와 방식을 돌아보게 했다. 선물은 나 혼자 받았지만 그 뜻은 여러분과 공유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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