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칼럼-이하경 중앙일보 주필] 우리는 왜 제왕적 대통령과 결별해야 하는가
페이지 정보
댓글 0건 조회 593회 작성일 2021-02-22 10:22본문
신현수 민정수석 사의(辭意) 파문의 본질은 “나만 옳다”고 믿는 제왕적 대통령의 독주다. 청와대를 향하는 권력형 비리 수사 차단은 임기 말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다. ‘방파제’인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을 유임시키려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중을 박범계 법무장관이 제대로 읽었다. “왜 우리 편에 서지 않느냐”는 취지로 신 수석을 몰아세웠다.
‘신현수 파문’ 본질은 대통령 독주
청와대 향하는 수사 차단 위한 것
누구의 견제도 안 받는 절대 권력
‘싸가지 없는 진보’로 되돌아갔다
“윤 총장은 문재인 정권의 총장”이라는 대통령의 말을 믿고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을 중재하려던 신 수석은 “창피해서 더는 못 하겠다”고 했다. 헌법 11조가 명령한 ‘법 앞의 평등’은 실종됐다. 기업 CEO로 잔뼈가 굵은 유영민 대통령비서실장과 합리적인 신 수석의 기용으로 민생 중심으로 국정운용 기조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무너졌다.
문 대통령은 2012년 대선 패배 이후 반성했다. “혹시 우리가 민주화에 대한 헌신과 진보적 가치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선을 그어 편을 가르거나 우월감을 갖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다.”(『1219 끝이 시작이다』) 그런데 ‘싸가지 없는 진보’는 여전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범죄를 저지르면 누구나 수사의 대상이 된다. 원전 경제성 평가 조작, 울산시장 선거 개입, 라임·옵티머스 사태, 조국 일가 비리,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혐의로 정권 실세와 강성 친문(親文) 의원들이 줄줄이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상황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신현수 파문’의 핵심 코드다.
수사와 재판을 받는 의원들은 내친 김에 중대범죄수사청을 만들자고 한다. 검찰은 공소유지나 하는 허수아비가 된다. 기상천외한 법안을 발의한 황운하·최강욱 의원은 “검찰의 선택적 수사”를 문제 삼았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중수처 신설은) 검찰개혁의 마지막 단추”라고 주장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고간 ‘최순실 게이트’보다 심한 국정농단이다.
국민을 무시하는 비상식의 출발점은 제왕적 대통령제다. 한국의 ‘차르’는 구중궁궐에 앉아 국민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심부름꾼을 뽑았는데 상전이 돼서 군림한다. 대부분 비극적 운명을 맞는다. 문 대통령도 의원 시절 제왕적 대통령제를 비판했다. “대통령제보다는 내각책임제가 훨씬 좋은 제도다. 민주주의가 발전된 대부분 나라들이 내각책임제를 하고 있다. 대통령제를 해서 성공한 나라는 미국 정도며, 미국도 연방제라는, 연방에 권한이 분산됐다는 토대 위에 성공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와 환경이 다르다.”(연합뉴스)
그랬던 문 대통령도 제왕적 대통령의 길을 가고 있다. 민의를 받들겠다는 의지가 아무리 넘쳐도 제도가 불량하면 다원적 의사결정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대통령제의 원산지는 미국이다. 국가원수와 행정수반의 권한을 한 사람이 갖는다. 승자독식이어서 연립정부를 구성할 필요가 없다. 독재자가 출현하기에 딱 좋은 제도다. 문 대통령도 갈파했듯이 성공한 나라는 미국 정도다. 미국은 폴리비오스의 권력분립, 몽테스키외의 3권분립을 토대로 국가를 건설하고 독립전쟁의 영웅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는 총사령관 시절 “왕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사실상의 ‘종신 군주’가 될 수 있었지만 한 차례 연임했고, 8년 만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평화적 권력이양의 선례를 남겼다. 미국이 ‘선거 군주제’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닌 ‘민주적 대통령제’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워싱턴의 초인적 절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미 6개국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킨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가 ‘종신 대통령’에 취임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장기집권으로 몰락한 이승만·박정희와도 달랐다.
자국의 최고 지도자에게 ‘대통령(大統領)’이라는 극존칭의 전근대적 호칭을 부여한 나라는 지구상에서 한국뿐이다. 시민혁명을 통해 건국한 나라답게 미국은 유럽의 황제와 다른 ‘회의 주재자(presider)’라는 의미의 ‘president’를 사용했다. 수평적 리더십의 상징이다. 문제는 일본이 19세기 후반 ‘대통령’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이다. ‘통령’(統領)은 ‘사무라이를 통솔하는 우두머리’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위계(位階)를 강요하는 전근대적 호칭을 만들어냈다. 태평양을 건너오면서 의미가 변질된 것이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위압적, 권위적 용어는 “대통령 말씀은 복종의 대상이다”라는 억압적 명제를 내면화시킨다. 정작 일본은 대통령이 존재하지 않으니 비틀린 용어로 인한 피해도 없다. 그런데 왜 우리만 낡은 유물인 ‘대통령’을 부둥켜안고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21세기 대한민국의 국민은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믿고 있다. 국민이 뽑은 일꾼이 주인에게 “군말하지 말고 내 말을 따라야 한다”고 큰소리치는 건 시대착오가 아닌가.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제왕적 대통령과 단호하게 결별해야 한다.
원문보기 https://news.joins.com/article/2399680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