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칼럼-양권모 경향신문 편집인]민주당이 호명한 ‘샤이 진보’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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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780회 작성일 2021-04-14 10:00본문
‘생태탕 선거’가 끝났으니 고백해도 되겠다. 호남 태생이고 586인 서울 시민 구보씨는 처음으로 ‘민주당’을 찍지 않았다. 불과 1년 전 총선에서도 주저없이 1번을 찍었던 구보씨다. 정부·여당이 마냥 미더웠던 건 아니다. 그때도 이미 부동산 정책은 실망스러웠고, 스멀거리는 위선과 오만의 행태는 볼썽사나웠다. ‘조국 사태’의 포연도 자욱했다. 그러함에도 1번을 거리낌 없이 선택한 건 ‘태극기 세력’과 손잡고 심판론만을 외치는 꼴통 보수당을 대안으로 찍을 수는 도저히 없었기 때문이다. 5·18망언은 확인사살이었다. 구보씨는 ‘최악’을 응징하기 위해 주저없이 1번을 찍었다. 민주당의 180석 압승에는 팬데믹 위기 상황이 작용했지만, 형편없는 야당 ‘복’도 한몫을 했다. 야당의 반대와 발목잡기를 핑계 삼지 못할 절대의석(180석)을 확보했으니, 구보씨는 이제 잘할 줄 알았다.
구보씨의 기대가 실망과 허탈로 바뀌는 데는 1년이면 충분했다. 입법 독주가 이어졌지만 실제 개혁과 민생에서 성과는 희미했다. 1년 내내 추미애·윤석열의 충돌로 국정 동력을 소진했다. 집값 폭등 등 수그러들지 않는 부동산 파동은 정책적 무능을 대변했다. 구보씨 주변 사람들도 “부동산이 최악”이라고 입을 모은다. 구보씨의 아파트도 이 정부 들어 쉼없이 올랐으나 다른 동네의 벼락같은 집값에 비하면 박탈감만 커진다. 집 살 기회를 사실상 빼앗긴 무주택자들과 청년들의 절망감은 말할 나위 없을 터이다.
‘LH 사태’는 구보씨의 인내력을 바닥나게 했다.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 수 없게 하겠다”는 정부가 뒤로는 땅 투기 천국을 만들어 놓은 꼴이다. 왜 신도시 땅 투기에 연루된 인사들은 국민의힘보다 민주당에 더 많은가. “나라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둑이 많은 것이다”라는 허경영의 선거구호에 청년들이 공감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서울 25개 구 중에서 무주택자 비율이 가장 높고, 아파트 평균 가격은 낮은 구보씨의 동네는 이번에 투표율이 두번째로 낮았다. 서초구와는 10%포인트 차이가 났다. ‘부동산 분노’가 서울시장 선거의 승패를 좌우한 건 사실이다. 한편으로 무주택자와 집값이 덜 오른 지역의 사람들은 국민의힘을 찍기보다 투표 자체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부동산 불만을 표출한 셈이다.
구보씨가 처음으로 민주당 찍기를 포기한 것은 부동산 때문만은 아니다. 유주택자인 구보씨에게 부동산 이해는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보다 평등과 공정, 정의를 앞세우는 이들이 벌이는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적인 행태, 나만이 옳다는 오만의 행렬에 구보씨는 손을 뗐다. 임대차 3법을 주도한 김상조·박주민의 전·월세 올리기는 위선의 끝장을 드러냈다. 보궐선거 원인을 제공한 소속 시장들의 성추행에 대한 민주당의 뻔뻔함은 또 어떠한가. 불과 1년 전에 ‘창피해서’ 국민의힘을 지지한다고 말하지도 못하던 청년들이 국민의힘 유세차에 올라 불공정과 부정의에 울분을 쏟아냈다. 반성은커녕 세상 물정 모른다며 그들에게 훈계질하는 민주당에 구보씨는 질렸다.
미국 뉴욕타임스가 민주당의 선거 참패 원인으로 부동산 문제와 함께 ‘naeronambul(내로남불)’을 지목했다. 민주당의 삽질 때문에 진보가 위선의 동의어가 되고 있다는 게 구보씨는 한없이 부끄럽다.
다급해진 민주당이 선거 막판 ‘샤이 진보’를 호명할 때 구보씨는 기함할 뻔했다. 민주당 지지를 표명하는 일이 떳떳한 게 아니라고 자인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애초 ‘진보’와 ‘샤이’를 결합시키는 건 언어 농단이다. 진보 지지자임을 밝히기가 부끄러운 게 아니다. 민주당 지지자, 지지자였음을 밝히기를 부끄러워한다는 게 저들이 말하는 ‘샤이 진보’의 실체일 터이다. 민주당이 ‘샤이 진보’를 발화하는 순간, 진보라는 말을 드러내기 부끄러운 단어로 만들어버렸다. 패악질이다.
민주당은 개표 결과 ‘샤이 진보’의 부재가 확인되자 이제는 “지지층이 투표장에 나오지 않아 패배했다”는 정신승리법을 동원했다. 착각이다. 서울 25개 구 전체에서 패배한 선거 결과는 ‘샤이 민주당’의 투표 불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구보씨처럼 정권의 지지층 결집 호소에 호응하지 않는 방편으로 투표를 거부했기에 20%포인트 가까운 압도적 격차가 벌어졌을 것이다. 그 결과 ‘정권 심판’의 민심이 더욱 확연해졌다.
구보씨는 차마 국민의힘을 찍을 수 없지만, 진보를 부끄럽게 만든 민주당은 더더욱 찍을 수 없기에 기권을 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4140300055&code=990100#csidxf696aebdd265d36a5ec7521ba6a5f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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