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칼럼-이성철 한국일보 콘텐트본부장] 동네가게 사장님의 간절한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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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909회 작성일 2021-05-28 10:20본문
편의점 입점으로 위기 처한 동네가게
1+1판촉, 매장정비, 키오스크 등 도입
작지만 지속적 변화·혁신 통해 생존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작은 마트가 하나 있다. 말이 마트지, 구멍가게에 가깝다. 좁고 낡고 어수선하고. 그래도 손님은 많았다. 대형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기 때문에 소량의 식료품이나 간단한 생활잡화는 다들 이 가게에서 구입했다. 10개동 규모의 아파트 단지에 하나뿐인 가게였으니 장사는 꽤 쏠쏠했을 것이다.
이 안락한 판매환경에 지각변동이 생긴 건 약 2년 전이었다. 상가 내 빈 공간에 편의점이 문을 연 것이다. 가게 바로 맞은편, 고작 10미터 남짓 거리였다. 독점시장이 경쟁시장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상품, 진열, 마케팅 등 모든 면에서 동네가게와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 대기업 계열 편의점이었다. 다윗은 간절한 믿음과 돌팔매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렸지만, 이 빤한 아파트 단지 안에선 그런 기적이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접할 때 소비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이중적이다. 마음은 기존 가게에 대한 안쓰러움이 지배하지만, 그럼에도 발길은 편리하고 깨끗한 편의점으로 향하게 된다. 재래시장 주변에 이마트가 들어서고, 동네빵집 옆에 파리바게뜨가 문을 열고, 회사 근처 테이크아웃 커피점 맞은편에 스타벅스가 입점했을 때처럼 말이다. 나 역시 어떻게든 가게 사장님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려 가면서도 결국 편의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난 그 가게가 곧 문을 닫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가게는 지금도 영업중이다. 영세자영업자가 2년 넘게 버티고 있다는 건, 편의점이 없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장사가 된다는 얘기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편의점 입점 이후 가게는 더디지만 하나씩 변신을 시도했다. 우선 전에 없던 1+1, 2+1 상품이 생겨났다. 대형마트나 편의점 아닌 동네가게에 판촉행사 상품이 등장한 건 정말 놀랄 일이었다. 가격도 일부 내린 듯했다. 편의점에서 1,300원인 새우깡을 이 가게에선 1,200원에 팔고 있다. 다양한 멤버십 할인이나 적립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편의점과 가격경쟁을 하려면 마진을 줄여서라도 판매가를 낮출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올해 들어선 두 가지 획기적 변화가 있었다. 우선 지난 겨울 가게는 새 단장을 했다. 리뉴얼까지는 아니고 내부수리 수준이지만, 어쨌든 전보다 훨씬 환하고 깨끗해졌으며 상품 진열도 깔끔해졌다. 더 극적인 건 키오스크 설치와 24시간 운영이다. 계산대 앞 무인결제기가 하도 신기해서 가게 사장님한테 이것저것 물어봤다.
"앞으론 배달주문도 받을까 하는데 배달 갔을 때 손님이 오면 직접 바코드 찍고 결제하시라고 설치했어요. 다 아파트 주민들이니까 믿고 하는 거죠. 그리고 혼자 가게를 하다 보니까 매일 밤 늦게 문닫고 정리하고 다시 아침에 문 여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24시간 열어 놓기로 한 거예요. 어차피 저 편의점도 24시간 하니까..."
2년 전 편의점이 왔을 때 가게 사장님 속은 아마 시커멓게 탔을 것이다. 포기도 수십 번은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절박한 고민 속에 하나씩 바꿔 나갔고, 그렇게 2년을 버텨 왔다. 손바닥만 한 동네가게에 판촉상품 개념이 도입되고 키오스크와 무인운영이 시도되는 것, 이런 게 바로 혁신 아닐까.
생각해보니 이사 왔을 때 철제와 유리쓰레기 분리배출 방법을 처음 가르쳐준 사람이 가게 사장님이었다. 거실 LED전구 종류와 교체요령을 설명해준 것도 이분이었다. 무뚝뚝해 보이는데 물어보면 뭐든 소상하게 가르쳐준다. 편의점 알바생에게선 들을 수 없는 얘기들이다. 혁신에 더해진 인간미 넘치는 친절, 내가 내린 이 '다윗' 가게의 생존 비결이다. 사장님 파이팅!
원문보기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52617380001880?di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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