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칼럼-김명수 매일경제 논설실장] 대만 반도체 華商을 뛰어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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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82회 작성일 2024-05-30 13:38본문
인터넷시대 이끈데 이어
AI반도체 전쟁 승자로
한국도 벤처韓商 키워
칩 전쟁서 살아남아야
201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지식포럼에는 인터넷 시대 부흥을 이끈 창업자 2명이 연사로 등장했다. 제리 양 야후 공동창업자, 스티브 첸 유튜브 공동창업자. 이들의 공통점은 어려서 이민을 간 대만계 미국인이라는 점이다. 야후는 구글보다 앞서 세계를 제패한 인터넷 포털이고 유튜브는 동영상 포털의 원조다.
대만계는 반도체 전쟁에서도 빛을 발한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세계 1위 업체인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대표적이다. 이민자인 젠슨 황은 1993년 엔비디아를 창업한다. 젠슨 황은 창업 초기엔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에 의존했지만 최근엔 오히려 TSMC에 제품 생산을 의뢰하면서 TSMC의 성장에 기여한다. 올 들어 엔비디아 주가가 115% 뛸 때 TSMC 주가도 53.84%나 오른 이유다. 데이터센터용 서버부품 설계회사인 슈퍼마이크로컴퓨터(SMCI)의 최고경영자(CEO)도 대만계인 찰스 량이다. AI 반도체 업계에서 쌍벽을 이루는 AMD의 CEO도 대만계다. 이쯤 되면 대만계 화상(華商)이 AI 반도체 공급망을 장악한 셈이고, 21세기 AI 반도체 전쟁의 승자라 할 수 있다.
승리를 이끈 것은 대만계 이민자들의 도전정신이다. 대만에선 중소기업은 기술력만 있으면 대기업과도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는 문화다. 덕분에 대만인은 창업을 선호한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벤처캐피탈을 운영중인 손영권 월든캐털리스트 대표는 대만의 공대 선호도와 기업가정신을 꼽는다. 그는 “제가 MIT에서 공부할 당시 MIT는 메이드인타이완(Made In Taiwan)의 약자라고 할 정도로 대만계 공대생들이 넘쳤다”고 전한다. 대만인들은 미국에 이민을 오더라도 특유의 기업가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도전정신이 넘치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특히 미국에서 자란 대만인들은 미국의 벤처 생태계를 적극 활용한다. 스티브 첸도 유튜브를 구글에 팔아 거액을 만진 뒤 또 다른 창업에 나선다.
반면 한국계 이민자들은 미국에서도 변호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을 희망한다. 아니면 대기업이나 금융 업체에 취업한다. 창업은 후순위다. 미국 유학생 중 드물게 현지에서 창업한 김정상 듀크대 교수. 양자컴퓨터 회사 아이온큐의 창업자인 그는 "한국계 이민자들 중 창업하는 분들이 있기는 하나 주로 어려서 이민 온 뒤 미국식 위험 감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전한다.
우리도 벤처 한상(韓商)이 등장하면 좋겠지만 이게 어렵다면 국내 벤처 생태계라도 더 키워야 한다. 실력 있는 기업들의 투자 위험을 줄일 수 없으면 지금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낼 수 있는 투자 회수 구조부터 만들어줘야 한다. 미국에선 벤처 투자가 활발하고 상장이나 인수·합병(M&A)을 통한 투자금 회수 성공 사례가 빈번하다. 공정한 성공 사례가 많으니 젊은이들이 벤처기업 창업에 나서고, 시중 자금도 벤처로 흘러가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된다.
국내에도 벤처 투자금은 많은 편이다. 투자금이 잘 회수돼 벤처 투자 자금이 넘치는 건 아니다. 공공부문 자금이 많은 덕분이다. 투자금 회수를 위해 상장에만 주로 의존한 결과 왜곡마저 발생한다.
가장 큰 문제는 대기업들의 벤처 투자가 쉽지 않다는 점. 최근 기업 주도형 벤처캐피털(CVC)을 통해 대기업의 벤처 투자 길을 터줬으나 여전히 녹록지 않다. 대기업이 국내 중소기업을 인수하면 '문어발식 확장'이란 비난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기업은 국내 업체 대신에 해외 기업 인수를 선호한다. 실제 한 그룹의 경우 최근 인수 기업 중 국내 기업이 10%라면 해외 기업은 90%다.
우리는 벤처기업이 대기업으로 쉽게 성장할 수 있도록 계층 이동 사다리가 많은 역동적 경제구조도 만들어줘야 한다. 그래야 반도체 전쟁에서 우리 기업들이 혁신 벤처기업과 협력해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 "구글이란 거대 플랫폼이 있지만 결국 파괴적 기술을 만드는 것은 스타트업이다." 제리 양 야후 창업자가 5년 전 세계지식포럼에서 강조한 말이다. 지금도 유효한 교훈이다.
[김명수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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