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칼럼-이하경 중앙일보 주필] 대선 앞두고 부활한 이승만·박정희·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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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708회 작성일 2022-02-21 10:09본문
로마 공화정을 대표하는 정치인 키케로는 기원전 64년 42세의 나이로 최고위직인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귀족이 아니어서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친동생은 “모든 층의 유권자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라” “카멜레온처럼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을 맞춰라”고 조언했다. 압도적인 표 차로 승리했다.
3·9 대선의 양강(兩強)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공약’을 쏟아붓고 있다. ‘수당 신설’ ‘인상’ 공약이 흘러 넘친다. 병사 월급 200만원은 공통 공약이 됐다. 실현 가능성과 무관한, 영혼 없는 ‘아무말 대잔치’다. 포퓰리즘에 반대하고, 교육·노동·연금 개혁을 하겠다는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신기하게 보일 정도다. 공약 이행 비용으로 이 후보는 5년간 ‘300조원 이상’, 윤 후보는 ‘266조원’이라고 했지만 누구도 믿지 않는다. 키케로 형제라도 기가 막힐 것이다.
이재명·윤석열 당파 초월해 인정
대통령다운 인식·행동 보여준 것
화해·통합·긍정 역사의 출발 되길
양당은 ‘소가죽 굿판’ ‘기생충’으로 상대를 모욕한다. 후보들도 ‘주술사’ ‘히틀러’라는 극단적 혐오에 나섰다. 국가 전략과 비전은 보이지 않는다. 외국 언론도 “추문과 말싸움, 모욕으로 점철된 역대 최악의 선거”라고 비판한다.
다만 전직 대통령들의 실체와 공로를 인정한 것은 공동체 통합을 위해 바람직한 메시지다. 이 후보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통합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윤 후보는 “지역주의를 깨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꿈을 이루겠다”고 했다. 표를 흥정하기 위한 카멜레온의 표변은 아닐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 휴전 협상 중에 미국과 사투(死鬪)를 벌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거나 한국에 혼자 싸울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다. 한국전쟁 참전을 ‘내키지 않은 십자군 원정(The Reluctant Crusade)’으로 여기고 손을 떼려는 미국의 기류를 겨냥했다. 아이젠하워는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을 통해 “미국은 유사시에 영국과 행동을 함께 한다”고 냉정하게 반응했다.
최빈국(最貧國) 대통령 이승만은 세계 최강국 미국의 외교안보 구도를 완강히 거부했다. 미국은 1952년 이승만 정부 전복 계획을 세웠고, 53년에는 이승만을 제거하고 아예 군사정권을 수립하는 ‘에버레디 작전(Plan EverReady)’까지 세웠다. 하지만 최종 승자는 이승만이었다. 그는 미국의 트루먼, 아이젠하워 두 대통령과 차례로 맞서 생명줄 한·미 동맹을 거머쥔 영웅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9년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는 카터 미국 대통령과 담판을 벌였다. 6월 30일 청와대에 최후 통첩을 하러 온 카터와 마주 앉은 박정희는 45분 동안 ‘반대 문서’를 읽었다. 분노한 카터는 턱 근육을 씰룩거리면서 배석한 밴스 국무장관과 브라운 국방장관에게 “박정희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한국에서 미군을 전원 철수시키고 말겠다”는 메모를 전달했다. 결국 카터는 박정희에게 졌다. 한국이 반정부 인사 87명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미군 철수를 포기했다.
박정희는 북한의 남침을 막기 위해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1978년 9월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에게 “핵무기 개발의 95%가 완료됐고 81년 상반기부터는 생산할 수 있다”고 했다(『두개의 한국』 돈 오버도퍼·로버트 칼린). 박정희는 국가의 생존을 위해 동맹인 미국과의 갈등도 불사했다. 진정한 애국자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것이다. 탁월한 선각(先覺)의 능력은 1964년 박정희의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 때도 발휘됐다. 전국이 반대 물결에 휩싸여 있을 때 “상호 이익이 보장된 협상안이라면 야당도 반대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사쿠라’ 소리를 들었지만 현실주의를 선택했다. 1998년 한·일 대중문화 개방도 여론의 70% 이상이 반대했지만 신념을 가지고 실행했다. 일본의 오부치, 고이즈미 총리와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존경심을 표시한 아시아의 거목이었다.
김대중은 자신을 탄압하고 수장(水葬)시키려 했던 박정희를 용서하고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다. 자신을 사형시키려던 전두환 전 대통령 사면에 앞장섰고, 그의 지혜를 경청했다. 박정희의 산업화 공로를 인정했고, 정보화를 성공시켜 한국을 IT 강국으로 만들었다.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를 깔았고, 김대중은 전국을 초고속 통신망으로 연결하는 정보고속도로를 만들었다. 김대중은 정적과 화해하고 통합의 길을 걸었다.
유엔무역개발기구(UNCTAD)는 지난해 한국을 선진국으로 격상시켰다. 뛰어난 국민과 함께 이승만·박정희·김대중이 최대 공로자다. 그 힘으로 민주화를 이뤘다. 세계가 인정한 수퍼스타를 우리만 과(過)를 부각시켜 평가절하해 왔다. 시대착오적 이념 대립 때문이다.
이재명·윤석열 후보가 세 거인(巨人)의 실체와 공로를 인정한 것은 대통령다운(presidential) 인식과 행위다. 진심이라면 분열을 일상으로 만든 심리적 내전(內戰)이 종식될 것이다. 안팎의 난제와 마주한 경험 부족의 새 대통령에게 포퓰리즘을 넘어선 진정한 리더십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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