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칼럼-양상훈 조선일보 주필] 놀라운 한국, 엔지니어 군단에 바치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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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622회 작성일 2022-09-15 10:02본문
피부로 느껴지는
달라진 한국 위상
그중에서도 놀라운
한국 무기의 유럽 진출
최고는 아니지만
수준급인 엔지니어들이
만들어내는 기적
9월 6일부터 9일까지 폴란드 키엘체에서 열렸던 MSPO 국제 방산전시회에 참가한 K9자주포. /한화디펜스
최근 달라진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피부로 느꼈다는 얘기들을 자주 듣는다. 세계 3대 아트페어의 하나인 영국 프리즈가 서울에서 열려 젊은 고객들이 줄을 이어 전시회를 찾았다. 서울 행사에서 뉴욕보다 더 높은 매출액을 기록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고가의 제품들이 워낙 빨리 팔려 직원들이 할 일이 줄었다고도 한다. 서울은 세계 미술계에서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는 시장이 되고 있다.
얼마 전 한 분이 이탈리아 알프스에 갔다가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과 만났는데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여러 명이 엄지를 치켜세웠다고 한다. 아무 이유도 없었다고 한다. 나라 이름만 듣고 호감을 표시한 것이다. 미국 한 대도시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노래가 나오자 길을 걷던 사람들 상당수가 ‘동작 그만’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CJ제일제당은 유럽 판매 제품 일부에 한글 상표 병기를 검토한다. 포장지에 한글이 있어야 제품 이미지가 더 높아진다고 현지에서 요구했다는 것이다. 국제 사회에서 한글은 더 이상 처음 보는 이상한 문자가 아니다. 세계 최고 권위지인 뉴욕타임스가 홍콩 사무소 일부를 서울로 옮겼다. 워싱턴포스트의 서울 허브 센터는 워싱턴, 런던과 함께 국제 뉴스 속보를 지휘한다.
에미상 시상식에서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남우주연상과 감독상을 받았다. 이미 영화 기생충과 미나리가 아카데미 작품상과 여우조연상 등을 받으며 영화 한류 바람을 일으켰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다투는 엑스포 유치 경쟁에서 한국 비장의 카드 중 하나가 BTS라고 한다. 사우디엔 이런 문화가 없다. BTS가 한국의 위상에 미친 영향은 알면 알수록 대단하다.
국내에선 많은 부정적 현상으로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한국이라는 나라가 갖는 국제 사회에서의 비중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높아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중에서도 놀라운 것이 우리가 유럽에 수십조원의 무기를 판매하게 됐다는 소식이다. 유럽은 세계 전쟁 역사의 중심지였고 군비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현장이다. 수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장 앞선 군사 기술을 가진 지역이다. 그런 곳에 총 한 자루 못 만들던 한국이 첨단 무기를 수백억 달러어치나 팔게 됐다. 무기는 TV와 같은 상품이 아니다. 자국의 명운이 달린 제품인데 한국제를 쓰기로 한 것이다. 기적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한국보다 앞선 군사 기술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기술을 경제성 있는 대량 생산으로 연결시키지 못한다. 세계 최고라는 독일 탱크는 한국 K2 전차보다 성능은 높지 않으면서 가격은 몇 배 비싸다. 그나마 생산 속도는 비교도 안 되게 느리다. 프랑스 자주포는 한국 K9 자주포보다 비싸면서 성능과 생산 속도에서 모두 뒤처진다. 한국 FA-50 전투기는 유럽 최첨단 전투기보다 성능은 떨어지지만 구입비와 유지비가 훨씬 싸고, 더 실용적이며, 무엇보다 ‘언제까지 몇 대 만들어달라’는 주문에 맞출 수 있는 서방 세계 유일의 전투기다. 지금 이 시기에는 미국 전투기 업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구매국 입장에서 당연히 한국 무기를 선택해야 하지만 그동안 ‘한국’이라는 브랜드가 약점이었다. 그런데 국가 브랜드가 올라가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사정이 급해지니 주저 없이 한국 무기를 선택하고 있다. 서방에서 한국처럼 양질의 무기를 합리적 가격으로 신속하게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나라가 단기간에 출현할 가능성도 없다. 유럽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호주, 중남미로 한국 방산제품 시장이 넓어질 것이다.
1976년 ‘기계창’이란 가짜 이름을 내건 무기 연구소에서 밤낮을 잊고 일했던 엔지니어들과 이들을 뒷받침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오늘의 이 모습을 보면 도저히 믿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한국이 있게 만드는 데 정치인, 기업인, 문화예술인 등 많은 분야의 인재들이 공헌했지만 필자는 이 엔지니어들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수공업 수준의 초창기 공업에서 중화학 공업을 거쳐 오늘의 첨단 산업으로 오기까지 수십만명의 엔지니어가 청춘을 바쳐 일했다. 한국 이공계 연구원은 아직 질적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지만 규모는 최상위권이다. 산업 현장에선 석사급 엔지니어의 숫자도 중요한 변수가 된다. 지금도 매년 2만명 안팎의 이공계 석사가 배출된다. 이들은 적어도 ‘만들어 내는 일’에서만큼은 세계 최고다. 똑 같은 정유공장인데 이상하게 한국에서 더 잘 돌아간다고 하는 것도 엔지니어의 힘이다. 유럽 국가에 기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엔지니어 군단이 없다.
한국 엔지니어 군단이 반도체 신화를 만들고, 세계 최고의 한국형 원자로를 설계하고, 세계 가전제품 시장을 석권하고, 전기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제 강대국의 전유물인 무기 시장까지 파죽지세로 진출하고 있다. 엔지니어 군단이 뿜어내는 이 하드 파워가 BTS류의 소프트 파워와 합쳐져 새로운 한국 역사를 계속 써 나갈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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