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칼럼-양상훈 조선일보 주필] 이태원 참사처럼 미·북 핵군축 회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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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9회 작성일 2022-11-28 10:01본문
조여오는 북핵 사태
우리 사회 대처는
‘설마’와 ‘외면’
갑작스러운 사고처럼
우리 안위 흔들 사태도
‘설마’를 뚫고 올 것
이제 국민에겐 별 관심도 없는 주제가 됐지만 북한 핵 사태가 결국 어떻게 될지에 대해 떠올려보는 그림이 있다. 언젠가는,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미국과 북한이 이른바 ‘핵 군축 협상’의 테이블에 마주 앉게 될 것으로 본다. 북한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핵 군축 협상의 기본 전제는 당연히 북한 핵 보유의 공식 인정이다. 북한이 핵 탄두 개수를 줄이고 미국을 겨냥한 대륙간탄도탄(ICBM)을 축소, 폐기하는 대신 한미 동맹의 성격 변화와 주한미군의 대대적 감축 카드가 테이블 위에 오를 것이다.
지난 18일 북한이 발사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포-17형'/노동신문 뉴스1
너무 비관적인 상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 핵 문제의 30년 역사는 우리 입장에서 가장 비관적인 시나리오, 그래서 ‘설마’ 했던 그대로 흘러왔다. 북한이 설마 핵실험까지 하겠느냐고 했지만, 핵실험을 했다. 대륙간탄도탄이 아니라 인공위성 로켓일 거라고, 끝내 못 만들 거라고 했지만 정반대로 됐다. 핵실험은 한 번 하고 그치겠지 했는데 6회나 했다. 설마 했는데 수소폭탄까지 개발했다. 우라늄 농축은 못 할 거라고 했는데 했다. 중국 러시아가 북의 핵 보유까지 용인하지는 못할 거라고 했는데 용인했다. 이 과정에서 북이 무너질 것이라고 했는데 아니었다. 북핵은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했는데 북한 스스로 주 목표가 한국이라고 밝혔다. 북핵은 외교 협상 카드라고 했는데 실전용 전술핵까지 개발했다. 북핵 문제가 앞으로도 우리 입장에서 가장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예측은 합리적이다. 그것이 북한이 기를 쓰고 핵을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언론에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으나 지난 10월 27일 미 국무부 보니 젱킨스 군비통제·국제안보 담당 차관은 한 콘퍼런스에서 “북한이 대화를 원하면 (핵)군축 (협상)이 옵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다음 날과 그 며칠 뒤에 반복해서 이를 극구 부인했다. 하지만 국무부 군비통제·국제안보 차관의 머릿속에 북한과의 핵군축 협상이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젱킨스 차관이 원래 그런 성향이라고는 하지만 그 사람뿐만이 아니다. 이미 미국 외교협회(CFR) 회장 등 여러 전문가들이 “대북 제재 완화를 대가로 북한에 군축 협상을 제안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지난 5월 미국 전략사령부에서 미 정보기관들 총괄 지휘부(국가정보국장실)의 주재로 비공개 북핵 토론이 열렸다. 처음으로 북핵 문제만으로 열린 것이다. 미군 고위 관계자는 이 자리에서 북한이 조만간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제로 퍼센트”라고 말했다고 한다. 토론에 참석한 국가정보국장실 분석가 출신은 “가까운 미래에 핵무기를 발사할 국가가 있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북한”이라고 했다. 이 토론회는 이제 북한 비핵화는 물 건너 갔으며 북핵 사용 억지가 목표가 됐다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미국 입장에서 북핵 사용 억지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이 북한과의 핵 군축 협상이다. 미국은 북핵이 100개, 200개를 넘어가는 상황은 도저히 방치할 수 없다. 한국의 이익을 희생하고 북한에 양보할 결심을 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것이다.
핵 군축 협상이 공식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북한이 전술핵 실험과 미국을 겨냥한 대륙간탄도탄의 핵탄두 대기권 재진입 실험에 모두 성공한 이후가 될 것이다. 미국 전문가들은 북한이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가 미·북 핵 군축 협상에 흔들려 큰일 날 나라는 아니다. 하지만 심각한 걱정거리임에는 틀림없는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방 안에 코끼리가 들어와 앉으면 사람들이 처음에는 난리 법석을 피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쩔 수 없다는 분위기가 생기면 그냥 코끼리를 못 본 척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 인간 심리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의 일상을 지탱해주는 것은 ‘설마’다. ‘설마 김정은이 핵을 쏘겠느냐’ ‘핵을 쓰면 저도 죽을 텐데 설마 저 죽을 짓을 하겠나’라는 것이다.
북한 핵문제는 김정은이 핵을 쏠 것이냐는 것 이전에 우리가 사는 삶의 기본 조건이 바뀌는 사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땅에 미사일과 포탄 비를 퍼붓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땅에 포탄 한 발도 쏘지 못한다. 미국이 절대 쏘지 못하게 한다. 러시아가 핵을 가졌기 때문이다. 미·북 간 핵 군축 협상 뒤에 북한의 대남 도발도 이렇게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오스틴 미 국방장관 말처럼 핵은 다른 나라에 대한 ‘사냥 면허’가 될 수 있다. 북의 사냥감은 어딘가. 우리 사회의 ‘설마’를 비웃듯 북의 사냥이 벌어질 것이다.
일어날 확률이 매우 낮은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되면 사람들은 그 문제를 현실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핼러윈 축제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린다는 것은 다 알고 있었다. 그 얼마 전에 인도네시아에서 축구장 압사 사고도 벌어졌다. 하지만 이태원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누가 걱정했으면 다들 속으로 ‘설마’ 했을 것이다. 미·북 핵군축 회담도 그렇게 올 것 같다.
양상훈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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