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칼럼-양상훈 조선일보 주필] ‘의료 삼성전자’ ‘노벨 의학상’ 불가능한 ‘의대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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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21회 작성일 2023-03-16 09:37본문
초등학생 학원에 의대 준비반이 생길 정도다. 동년배들의 기억을 모아보면 과거에도 의대는 상위권이었지만 이런 정도는 아니었다. 1997년 외환 위기로 많은 직장인이 졸지에 실직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직장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망하지 않고 쫓겨나지 않을 직업에 대한 열망이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심어졌다. 그게 의사였다.
이제 좋은 일자리라는 대기업에서도 50대 중반 넘어서까지 버티기 쉽지 않아졌다. 임원 승진은 회사에서 곧 나가야 한다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 과거에도 50대 퇴직은 흔했지만 그때는 퇴직 후 20년 정도 더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50대 퇴직 후 50년을 더 살지도 모르는 세상이다. 요즘 의사는 70세가 넘어도 능력만 있으면 고용하려는 병원이 있다. 수입도 높다. 이런 상황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과 학부모가 의대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어느 자리에서 많은 분이 의대 쏠림 현상을 걱정했지만, 한 분이 “내가 지금 수험생이라도 의대를 가겠다”고 하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당장은 어떤 조치로도 이 물결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의대를 환자 치료 역할을 넘어서 의료 바이오 산업을 일으켜 세우는 기지로 만들어야 한다. 의사만이 아니라 국민을 잘 살게 할 의사 과학자들을 길러내자는 얘기다. 그렇게 되면 ‘의사 공화국’은 사회 병리 현상이 아니라 반도체 못지않은 국부를 창출할 기반이 될 수 있다. ‘의료 삼성전자’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의사라고 하면 수술하고 약 처방하는 치료(임상) 의사밖에 모른다. 미국 등 선진국엔 의사 과학자가 많이 있다. 의사 과학자는 의사 면허를 갖고 새로운 치료법과 의약품, 의료 장비를 연구 개발하는 사람이다. 의학, 과학, 공학 융합 연구 역량을 갖춰야 한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절반이 의사 과학자다. 나머지는 생물학자, 생화학자 등이다. 치료만 해온 의사 중 수상자는 없는 것으로 안다. 한국 의대에 수재가 다 모여도 노벨 의학상이 나올 수 없는 이유다.
치료 의사는 평생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지만 의사 과학자는 바이러스와 질병으로부터 온 인류를 구할 수 있다. 의사 과학자는 바이오 산업을 일으켜 수십 만 일자리를 창출하고 막대한 세금을 납부할 수 있다. 한국처럼 의대 쏠림 현상이 심한 나라가 없으니 세계 수준의 의사 과학자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현재 세계 상위 제약 회사 10곳 CTO(최고기술책임자) 중 70%가 의사 과학자다. 이들이 신약 개발과 투자를 결정한다. 미국 영국 투자 유치 상위 스타트업 20곳 중 의사 과학자가 창업한 곳이 3분의 1이 넘는다. 화이자 코로나 백신도 터키 출신 독일 의사 과학자 부부가 개발했다. 화이자 코로나 백신은 매출 900억달러, 최소 추정 이익 180억달러다. 역시 코로나 백신을 개발한 모더나의 공동 창업자 중 한 명도 MIT 교수인 의사 과학자다. 에볼라 치료제를 개발한 의사 과학자는 세계 20위권의 제약 기업을 만들었다.
세계 의료 시장 규모는 1조5000억달러라고 한다. 1조달러가 제약, 5000억달러가 의료 장비다. 한국은 이 시장의 2%를 차지하고 있다. 이 2%에 한국 의사들이 기여한 것은 사실상 ‘0′이다. 공대 출신들이 운영하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석권하는데 수재 집단 의사들이 경제에 기여하는 것은 없다. 환자 치료가 우선 문제이겠지만 ‘의사 공화국’이 됐다면 거기에 그쳐선 안 된다.
하버드대 병원 의사 3000여 명 중 3분의 1이 연구 의사라고 한다. 이들의 연구 프로젝트가 큰 부가가치를 만든다. 공대가 의대를 운영하는 곳도 있다. 이스라엘 명문 테크니온 공대 내 의대는 강력한 이스라엘 바이오 산업의 중심지다. 미국 일리노이 공대에도 의대가 있다.
불행히도 우리 현실은 한마디로 의사 과학자 불모지대다. 전국 의대 졸업생 중 연구 의사를 지망하는 사람은 극소수로 유명무실하다. 소수가 스타트업 창업도 하지만 아직 미약하다. 모두가 앞길이 보장된 치료 의사만 지망하고, 모험적인 연구 의사를 하려는 사람이 없다. ‘미래 먹거리 산업 바이오’ 운운은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다. 이 뿐이 아니다.
카이스트가 의사 과학자 양성을 위해 의전원을 만들려고 하자 의사협회에서 가로막고 있다. 치료 의사 숫자가 늘어날까 봐 반대하는 것이다.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이 “카이스트 의전원엔 인턴 레지던트 과정이 없다. 전문의 자격증이 없다. 임상 의사 경쟁력이 없으니 기존 의사들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호소하지만 기득권에 혹시라도 손해가 될까 봐 반대하는 의사들 앞에서 통하지 않고 있다. 다행히 윤석열 대통령이 카이스트 방문 때 의전원 설치 추진을 지시했다고 한다. 의료 바이오 산업이 발전하면 결국 의사들도 더 많은 기회를 얻을 것이다. 조금만 양보하고 멀리 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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