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칼럼-김창균 조선일보 논설주간] 워싱턴의 ‘공감 윤석열’, 서울서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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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9회 작성일 2023-05-08 09:46본문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6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열린 국빈만찬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함께 무대에 올라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돈 맥클린의 '아메리칸 파이'를 부르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 만찬장에서 부른 ‘아메리칸 파이’는 흑백 문자만 빽빽했던 우리 외교사에 알록달록한 화보를 남겼다. 미국 언론들이 정상회담 둘째 날을 전하며 뽑은 제목마다 ‘아메리칸 파이’가 등장했다. 뉴욕타임스는 윤 대통령의 열창이 2006년 미·일 정상회담 때 고이즈미 일 총리가 부른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를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백악관 저녁 행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이 노래의 첫 소절 “어 롱 롱 타임 어고”를 시원하게 뽑았을 때 미국 악단장은 눈동자가 커지며 환호했다. 태평양 너머 먼 곳에서 온, 문화적 배경도 다른 외국 정상이 미국인들의 애창곡을 익숙하게 소화해 내는 솜씨가 친밀감을 불러일으킨 게 아닐까 싶다. 우리가 ‘부산 갈매기’나 ‘목포행 완행열차’를 천연덕스럽게 부르는 파란 눈의 금발 아가씨를 볼 때 느끼는 정서적 유대 비슷한 것이다.
윤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도 26번의 기립 박수를 이끌어 냈다. 영어 발음이 현지인 수준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대방에게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부단히 연습했다는 느낌을 줬다. 어떤 메시지가 미국인들의 감정선을 건드리게 될지 고민한 흔적도 느낄 수 있었다. 연설 초반 윤 대통령이 “민주, 공화 어느 쪽 의석에 앉아 있든 여러분 모두가 대한민국 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을 때 의원들은 일제히 일어나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윤 대통령이 이번 방미 주제로 삼은 ‘강철 같은 한미 동맹’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대목이었다.
윤 대통령은 워싱턴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우리와 마음이 맞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지루한 수업 시간에 끌려 나온 고등학생 같은 표정으로 실무자가 적어준 대사를 암송하던 전임 대통령보다 공감 지수를 크게 끌어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정상회담에서 얻은 것이 있다고 본다.
어느새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지지만 윤 대통령이 국내 현장에서도 사람들 마음에 성큼 다가서는 모습을 보여준 시절이 있었다. 취임 첫 달 용산 집무실 앞 잔디 광장에서 ‘중소 기업인 대화’를 가졌을 때였다. 행사 시작 무렵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주최 측은 물론 500명이 넘는 참석 기업인들도 안절부절못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야외 행사를 빗속에서 진행해도 좋을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 대통령이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비가 오네요. 이런 날씨에 술 한잔 하면 기분 좋지 않습니까.” 순간 “와” 하는 함성과 함께 긴장이 풀리며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대통령은 50곳이 넘는 테이블을 빠짐없이 들르며 막걸리를 돌렸다. 행사는 정겨운 대화 속에 예정보다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이 광경을 필자에게 전해준 기업인은 “대통령이 사람들 기분을 흥겹게 하는 소질을 타고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윤석열표 소통’은 얼마 가지 않아 자취를 감췄다. 몇 차례 말실수와 인사 실패에 대해 비판이 일자 대통령은 감정 섞인 대응을 했다. 그리고 국민 시선을 피해 무대 뒤로 몸을 감췄다. 대통령의 접촉 반경도 좁혀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취임 일주일 만에 국회 시정연설을 했을 때만 해도 야당 의석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악수를 청했다. 우리도 야당과 대화하는 대통령을 보게 되나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정파의 벽을 뛰어넘기는커녕, 여권 내에서도 확실한 친윤 그룹만 끌어안고 나머지 우군 세력을 모두 내쳤다. 역대 정권을 패망으로 이끈 뺄셈 정치다.
국민들은 지난주 국제 무대 한복판에서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발산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목격했다. 익숙지 않은 언어와 문화 환경 속에서 움츠러들던 과거 지도자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피해자 코스프레로 국제사회에 부담을 주던 관성을 떨쳐 내고 미래를 선도하는 진취성을 과시한 대통령에게 자부심을 느꼈다는 국민이 적지 않다.
워싱턴에서 빛을 발했던 ‘공감 윤석열’의 모습을 서울에서도 보고 싶다. 수십 번 고쳐 쓴 원고로 미 의원들의 기립 박수를 이끌어 냈듯,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에 대해 국민의 동의를 구하는 노력과 정성을 쏟아 냈으면 좋겠다. 사사건건 시비 걸기 바쁜 야당을 향해서도 설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야당은 끝내 고개를 돌리고 뿌리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지켜본 국민은 대통령 편에 설 것이다. 동맹과 소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대통령이라면 국민의 마음을 얻기 위해 못 할 일이 무엇이 있겠나.
김창균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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