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균의 세상탐사/8.3] JP가 털어논 ‘그 여름의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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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801회 작성일 2011-08-03 10:46본문
JP(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회고는 강렬하다. 그는 “사실(현실)은 소설보다 기이(奇異)하다”고 말한다. 사실은 평면적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사실은 감춰진 이면(裏面)을 갖는다. 경륜과 노련미로만 알 수 있는 미묘한 요소가 있다. JP의 기억에는 이면과 경륜이 넘쳐난다. 소설보다 극적이고 흥미롭다.
최근 JP는 기자에게 김대중(DJ) 납치사건을 회고했다. 사건이 벌어진 8월(73년 8월 8~13일)을 앞두고서다. 그 납치는 한국 정치사의 파란과 곡절을 상징한다. 그 사건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작품이다.
이후락은 당시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다. JP가 국무총리였지만 권력 서열은 처졌다. 그 무렵 한국 정치는 격변의 소용돌이였다. 남북공동성명(72년 7·4)→유신(72년 10·17)→윤필용 사건(73년 3월)→DJ 납치사건으로 숨 가쁘게 진행됐다. 7·4성명, 유신의 설계자도 이후락이었다. 그의 2인자 권력은 절정기였다. 73년 초 윤필용(수경사령관) 사건이 터졌다. 이후락은 위기를 맞는다.
38년 전 그 여름 일을 JP는 지금처럼 들려준다. 그가 그려낸 사실은 절묘하다.
“그때 (윤필용 사건으로) 이후락은 박 대통령의 눈 밖에 났어”-.
“이후락은 꾀쟁이거든, 꾀쟁이가 무얼 저질러 놓으려 했는데··· 자기가 아니면 해결 못하는 걸 저질러야겠다고 꾸민 게 김대중 납치사건이야.”
윤필용 사건은 권력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윤필용의 언행이 발단이었다. “박 대통령은 노쇠했으니…후계자는 이후락”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발언은 이후락과 윤필용의 밀착 증거로 보고되었다. 사건은 이후락·윤필용↔박종규(청와대 경호실장)·강창성(보안사령관) 간 권력투쟁의 산물이었다. 사건 수사는 과잉과 조작의 비판을 받고 있다. 윤필용은 강제 예편됐다. 이후락은 퇴출 불안에 빠졌다.
이후락은 반전(反轉)을 모색한다. 그 무렵 DJ는 도쿄에서 유신반대를 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그 모습에 불만이었다. 이후락은 DJ를 납치해 서울로 끌고 온다. 대통령에게 사후 보고했다.
JP는 “박 대통령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든 거야”라고 말한다. 과잉 충성으로만 볼 수 없었다. 상황은 이후락의 의도대로 일단 펼쳐진다. 일본정부는 박 정권을 압박했다. 박정희는 이후락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그럴 경우 중정의 역할을 인정하는 게 된다. 권력 1인자 대통령이 통제하기 힘든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이후락은 그 속에서 신임과 충성을 다시 확보하려 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면 2인자의 위상은 되살아난다. 권력의 위기를 조성하면 역설적으로 2인자의 위상은 회복된다. 이후락 방식의 생존술이다. JP는 7·4공동성명도 그런 각도에서 바라본다. “이후락이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에 간 것도 마찬가지야. 그때도 저가 없으면 못할 것 같은 걸 만들었어.” 1인자도 거역하기 어려운 환경을 연출했다는 것이다. 그때 대북 협상을 놓고 1인자와 2인자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었다.
JP는 이후락의 참모적 기량을 인정했다. “육영수 여사는 이후락을 싫어했어. 하지만 박 대통령에게 이것 저것 해주는 사람이 필요한데···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어. 그래서 이후락을 안 쓰려다 여러 번 기용하곤 했지.”
이후락의 두뇌는 섬광(閃光)처럼 번뜩였다. JP는 “이후락은 문제를 일으키는 데 천재적이야. 일본말로 히라메키(閃き)가 있어. 그런데 일을 유익하고 원만하게 마무리하진 못했어”라고 말한다. 그런 인물의 존재감은 독특하다. 권위주의 정부건, 민주정부건, 대기업에서건 마찬가지다. 1인자는 그런 인물에 매료된다. 하지만 과도하게 중용하면 1인자의 장악력은 약화된다.
JP도 2인자였다. 5·16의 주역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사이 마무리 역할로 바꿨다. 그는 일본에 가서 DJ납치 사건을 정리했다. 그 한 달 뒤 그해 12월 이후락은 권좌에서 물러난다.
JP의 삶은 드라마다. 그만큼 인연도 기이하다.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97년 DJP 결속으로 이회창을 누른다. JP는 “어떤 모임에서 박 대통령과 악연 깊은 김대중을 왜 밀어줬냐고 묻더라.” 그래서 이렇게 설명해줬다고 한다. “박 대통령 시절 DJ가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어. 누가 그랬건 그 시대의 업보였어. 그 업보를 김대중, 당신의 소망으로 내가 풀어준다고 했지. 내각제, 영·호남 결속, 박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약속받았어. 그래서 도왔어.”
박보균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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