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희칼럼/5.2] 역사를 다루는 가장 나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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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6,329회 작성일 2013-05-02 09:20본문
<백년전쟁>식 사실조작은 역사해석 아닌 범죄행위
사관(史觀)에 따라 역사 다뤄도 \'사실\'은 정직해야
- 야스쿠니신사에 대해 알고 있어요? \"신사ㆍ숙녀 할 때 신사 아니에요?\" \"위인 아니에요?\" -(\'日 의원 168명 야스쿠니신사 참배\'기사제목을 보여주며) 어떤 기사인지 알아요? \"불쌍해요. 얘(야스쿠니신사)가요.\"
많이들 봤을 것이다. 며칠 전 TV뉴스에 나온, 고교생쯤으로 보이는 청소년들의 대답이다. 안중근 의사가 \"도시락폭탄 던지신 분\"이라고 한 학생이 도리어 기특해 보였다. 윤봉길 의사와 착각했어도 어쨌든 독립운동가로는 알고 있는 셈이니까. 기사 의도에 맞춘 편집을 감안해도 충격은 컸다. 어디 이게 청소년들만의 일이겠는가. 언제 어떻게 해방되고, 한국전쟁이 났는지조차 모르는 대학생들이 숱하다는 건 흔한 뉴스다.
대학 들어가는데 굳이 국사공부는 필요 없고, 그래서 고교 1학년 때 한번 몰아 가르치면 그만인 한심한 교육실태를 말하자는 건 아니다. 국사 홀대는 마땅히 고쳐져야 하지만, 당장 더 큰 문제는 다른 것이다. 이런 백지의 역사인식이 현실인 만큼, 대중을 상대로 역사를 말할 때는 정말 신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동일한 역사적 사실을 놓고도 각자 인식의 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법이다. 그게 사관(史觀)이다. 다양한 사관을 통해 역사는 더 풍부해진다. 그러나 사관에 따라 역사를 다룰 때도 분명한 금기는 있다. 어떤 경우에도 해석의 기본재료인 \'사실\'을 왜곡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잘 모르는 대중을 능멸하고, 시대를 기만하고, 역사를 욕보이는 범죄다. 요즘 한창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인터넷영상물 <백년전쟁>이 딱 그런 것이다.
독립운동 과정의 숱한 오류, 해방공간에까지 이르는 마키아벨리적 권모술수, 친일청산 실패, 독선과 독재 등 이승만의 과(過)는 넘치도록 발굴돼 있다. 여기에만 주목하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세우고, 전쟁을 극복한 공(功)까지 다 무시해도 이해해줄 수 있다. 그 또한 각자 역사관에 따른 해석의 자유이므로. 그러나 특정 시각을 주입하려 사료를 조작해가며 없는 일까지 만들어내는 사실왜곡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당초 \"새로운 스타일의 역사 다큐멘터리\"라던 제작 측은 비판이 일자 \"창작물\"이라고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재미만이 목표인 TV 퓨전사극조차 너무 사실과 동떨어지면 욕먹는 법이다. <백년전쟁>은 온갖 그럴듯해 보이는 자료에 저명 학자들까지 동원해 \'사실\'만을 다룬 정통 기록물로 보이게끔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뒤늦게 \"상상력을 가미한 패러디\"로 둘러대는 건 비겁한 변명이다.
\'진실을 알게 해줘 고맙다\' \' 그 동안 속고 산 게 억울하다\' \'학생, 자식들 다 봐야 한다\'…. 영상을 본 이들의 반응이다. 백지의 대중에게 사실조작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래서 역사를 갖고 장난치면 안 된다. 이런 무서운 결과를 보고도 \"소기의 목적이 달성됐다\"고 혹 흐뭇해한다면 그건 일말의 양심조차 없는 도덕불감에 다름 아니다.
과거 권위주의적 통치자들이 국가건설과 국민통합을 빌미로 일방적 역사해석을 독점했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에 그런 시대는 끝났다. 이후는 오히려 진자운동처럼 반대쪽 역사해석이 더 큰 흐름을 이루고, 좌우의 역사해석이 접점 없이 마냥 충돌만 해온 상황이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가능한 한 사실의 원형을 복구하고, 역사의 화해를 이루려는 노력이다.
때마침 그런 노력이 돋보이는 저작이 나와 말미에 소개한다. 전 공보처장관 오인환씨가 펴낸 <이승만의 삶과 국가>다. 10년 이상 방대한 사료를 모으고, 평생기자의 경험을 살려 상충되는 증언ㆍ자료를 심층취재기법으로 비교ㆍ분석해 최대한 실체에 가깝게 접근하려 한 역작이다. 특정 시각과 견해를 배제하고 지나치게 차가울 정도로 \'사실\'만을 다뤘다. 이념과 사관을 떠나 누구든 이승만과 현대사 이해의 출발점으로 삼을만한 책이다.
모름지기 역사를 다루는 방식은 이래야 한다. <백년전쟁>의 제작에 관여한 이들이라면 특히 공들여 읽고 부끄러움을 느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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