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칼럼-이진우 매일경제 논설실장] 어른의 정치가 필요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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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8회 작성일 2024-12-18 09:40본문
韓경제 비관전망 쏟아져
수출-트럼프-내수 3중고
여야정협의체 서둘러야
민생 챙기는 정치 아쉬워
인디언 태형이란 형벌이 있다. 인디언 전사들을 두 줄로 늘어서게 한 다음, 그 사이로 포로를 통과시키며 흠씬 두들겨 패는 방식이다. 대개는 중간에 쓰러질 만큼 잔혹한 체벌이다.
지금 한국 경제가 이런 신세다. 12·3 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해외에선 한국 경제에 대한 비관론이 쏟아지고 있다. 우리 스스로도 크게 꼬였다는 낭패감을 떨치지 못한다.
혼돈의 12월 3일 밤. 기업인 A씨는 국회 상황을 중계하는 TV 화면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민주당 국회의원의 모습을 발견했다. 답답한 마음에 그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그 야당 의원의 첫마디가 이랬다고 한다. "경제가 큰일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야당 의원이 경제 걱정부터 했다는 게 참 생경할 것이다. 그날의 변괴는 그만큼 기이하고 심각했다.
물론 '이만하면 선방'이라고 자위할 수도 있다. 주가와 원화값의 진폭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코스닥지수는 이미 사태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수출도 그럭저럭 버텼다. 12월 초(1~10일) 수출은 통관 기준으로 전달과 비슷한 증가세다. 국제신인도 역시 마찬가지다. 한때 상승했던 신용부도스왑(CDS) 프리미엄이 제자리로 돌아왔고, 국가신용등급은 변동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연기금, 외환보유고가 분칠한 겉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실상은 경제적 재난 상황이다. 우선 수출이 걱정이다. 수출 품목 중에는 정부와 기업이 팀을 이뤄 계약을 따내는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게 방산과 원자력이다. 다음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굵직한 수주는 난망하다고 봐야 한다. 반도체처럼 국가대항전이 펼쳐지는 품목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남들은 날아다니는데, 우리는 제자리에서 엎어진 꼴이다.
부쩍 과묵해진 트럼프도 영 찜찜하다. 그는 당선 이후 여태껏 한국 관련 코멘트를 하지 않고 있다. 계엄 파동 이후에도 침묵 모드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정치적 불확실성과 국론 분열은 대외 협상력을 뚝 떨어뜨린다. 대중국 수출통제와 관세전쟁에서 한국이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 있다.
가뜩이나 안 좋았던 내수 경기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소비와 관련된 거의 모든 지표가 빨간불이다. 사람 만나기를 꺼리는 작금의 사회 분위기는 광우병, 세월호, 코로나 사태 때와 비슷한 양상이다. 급락한 원화값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면 소비 위축이 가속화할 수 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우리가 경제위기에 이력이 나 있다는 점이다. 참고할 전례가 많다. IMF 외환위기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가깝게는 레고랜드 사태에 이르기까지 위기 탈출의 기획, 집행자는 공무원이었다. 그들은 위기 대응에 관한 한 상당한 노하우를 축적해놓았다. 평소에는 복지부동이네 뭐네 욕을 먹지만, 위기 앞에선 일사불란해지는 집단이다. 이번에도 그들을 뛰게 해야 한다.
다만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정치적 면책이다. 정치적 책임에서 자유로워야 비로소 공직사회가 움직인다.
바로 이 대목에서 여야정협의체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여야가 초당적 사안을 추려주는 것만으로도 공무원이 뛸 공간이 열린다.
여당이 야당 대표가 제안한 국정안정협의체 구성을 단칼에 거부했다. 그 심정은 이해가 간다. 비협조로 일관한 야당이 야속하고 의심스러울 것이다. 그렇다고 민생을 내팽개칠 순 없다. 여당으로선 입법 폭주와 내각 탄핵을 멈추기 위해서라도 야당과의 협의가 긴요하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주고받을 줄 아는 어른의 정치가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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