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칼럼-남궁창성 강원도민일보 이사 겸 미디어실장] 왕소군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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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3회 작성일 2025-03-20 09:30본문
사진이 없던 시절 그림이 있었다. 도화서(圖畵署)의 존재 의미다. 고대 중국 황실도 화원(畵員)을 두고 공식 의례를 그림으로 남겼다. 그들의 임무 중 후궁들의 얼굴을 그려 황제에게 바치는 일도 중요했다. 수천 명의 경쟁을 뚫고 총애를 받기 위해 황실의 여인들은 뇌물을 썼다. 화원의 손끝과 붓끝에서 미인과 추녀가 결정됐다.
한(漢)나라 원제(元帝) 당시 변방의 흉노족 우두머리가 배필로 한족 여인을 요구했다. 원제는 후궁들의 얼굴을 그려 놓은 책을 보고 가장 추한 왕소군(王昭君)을 오랑캐 왕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그녀가 떠나던 날 황제는 깜짝 놀랐다. 이런 미인이 황실에 있었다니…. 왕소군은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미운털이 박혔던 것이다. 그림책만 보고 여인을 선택한 패착이었다. 뇌물을 받아 먹으며 붓끝을 마음대로 놀린 화원의 머리통은 그날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왕소군의 비극은 계속된다. 남편이 죽자 오랑캐 풍습에 따라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한족은 아버지의 처첩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을 금지해 사람들은 혀를 찼다. 왕소군은 비련의 여인으로 기억됐다. 그리고 결국 중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돌무덤에 묻혔다. 그녀의 가녀린 몸은 땅 설고 물 설은 오랑캐 땅에서 썩어갔다. 하지만 이름 석 자는 고향에서 문학을 통해 부활했다.
당(唐)의 동방규는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시를 지었다. ‘오랑캐 땅은 꽃과 풀이 없어 봄이 와도 봄이 아니라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모래바람 휘몰아치는 변방의 땅은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더 사무친다는 심경을 담았다. 왕소군은 그렇게 서시(西施), 양귀비(楊貴妃), 우희(虞姬)와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늘이 춘분(春分)이다. 시간은 경칩(驚蟄)을 지나 청명(淸明)을 향해 가니 분명코 봄이다. 그러나 싹이 돋고 꽃이 피어도 오늘의 봄이 어제의 봄과 같지 않으니 왜일까? 왕소군 누이는 이 마음을 아시려나.
출처 : 강원도민일보(http://www.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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