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칼럼-황정미 세계일보 편집인] 김정은의 ‘마이웨이’ 노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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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62회 작성일 2024-01-31 11:43본문
한반도 전쟁 위기설은 추론일 뿐
북측 위기 때마다 판 바꾸기 전략
핵 믿고 공세적 전환 나선 김정은
‘전쟁이냐 평화냐’ 국론 분열 안 돼
새해 벽두부터 한반도에 전쟁 위기설이 떠돈다. 지난해 대만해협에 몰렸던 전운이 올 들어 한반도로 번지는 꼴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발언이 신호탄이 됐다. 한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규정하고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 평정, 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헌법에 반영하라”고 지시했다. 실제 김일성·김정일 체제에서 추진된 ‘조국통일’ 정책이 폐기됐고 평양 통일거리에 있던 ‘조국통일 3대 헌장기념탑’이 사라졌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3대 세습체제의 명분은 ‘선대의 유훈’이었다. 핵무장이 김일성, 김정일이 김정은에 전한 ‘비공개 유훈’이었다면 ‘하나의 민족’ ‘조국통일’은 대내외에 천명한 유훈이었다. 핵무기를 손에 쥔 김정은이 ‘하나의 민족’ 유훈을 폐기하고 한국 상대로 교전 운운하자 일부 한반도 전문가들은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1950년 그의 할아버지가 그랬듯 김정은이 전쟁을 하기로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고 본다.” 이 글을 북한 전문 매체 ‘38노스’에 기고한 로버트 칼린 미들베리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과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미국 내 손꼽히는 한반도 전문가다.
이런 유의 분석은 2019년 하노이 회담 실패 이후 김정은의 전략 노선 전환과 북·러 밀착에 따른 정세 변화를 근거로 한 추론일 뿐이다. 토마스 쉐퍼 전 북한 주재 독일 대사는 ‘38노스’에 칼린·헤커 주장에 반론을 실었는데 “미국과의 협상 실패가 왜 남한과의 전쟁으로 귀착된다는 건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귀환을 염두에 두고 대북 제재 완화와 북핵 동결, 주한미군 감축을 목표로 ‘제2의 빅딜’을 시도하겠다는 게 김정은이 긴장 수위를 높이는 의도라고 봤다.
도발 전망은 달라도 김정은이 판을 새롭게 짜려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돌이켜보면 북한은 위기 때마다 판 바꾸기 전략을 썼다. 김대중정부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햇볕정책의 성과라고 자평했지만, 김정일은 경제 위기를 돌파하는 카드로 활용했다. 태영호 의원은 “북한의 경제난 극복을 위해 김정일에게 절실했던 건 남북정상회담이었다”(‘3층 서기실의 암호’)고 썼다. 김정일은 남북경제협력에 기대어 자력갱생했을 뿐 아니라 은밀히 핵개발에 성공했다. 첫 북미정상회담으로 이어진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도 김정은의 승부수였다. 문재인정부 초기 말폭탄을 쏟아냈을 때부터 외무성에는 남한과의 대화를 준비하라는 지령을 내렸다는 게 전직 정보기관 고위 관계자 전언이다.
80년 남북관계 패러다임을 바꾸겠다는 김정은 발언은 일견 파격적이다. 룰 변경을 외칠 정도로 북한 내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징후다. 오랜 제재로 누적된 경제난, 젊은 세대의 한국 사회·문화에 대한 동경, 고난도의 4대 세습 작업이 김정은 체제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다만 수세적 입장에서 국면 전환을 시도했던 과거와 달리 김정은에게는 ‘만능의 보검’ 핵이 있다. 핵탄두 40∼50개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은 전술핵 탑재가 가능한 미사일 발사 시험을 빈번하게 해댄다. 핵 카드를 내세워 판을 바꾸겠다는 공세적 전략이다. 협상 상대는 물론 미국이다. 하지만 핵 볼모로 붙잡혀있는 건 우리다.
진보·좌파는 그동안 북한이 동족인 남한에 핵을 쏠 리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민족을 지우고 남한을 ‘제1 적대국’으로 규정한 지금은 어떤가. 우리 국민을 향한 북의 노골적인 핵 위협에 이들은 침묵한다. 김정은이 세계 제1 군사 대국으로부터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기는 어렵다. 한국, 일본도 자체 핵무장 없이 이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김정은이 가끔 힘자랑을 하면서 대한민국 여론을 흔들기는 쉽다. ‘전쟁이냐, 평화냐’ 같은 구호로 국론을 분열시키는 세력이 있어서다. 김정은이 만든 판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격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몇 차례 학습효과 덕분에 국민들이 더 이상 ‘북풍(北風)’에 현혹되지 않는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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