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호] 기자생활에서 배운 속도와 횟수 ( 임진모 음악평론가. 전 경향신문 출판국, 내외경제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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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05회 작성일 2015-02-27 16:07본문
374호
기자생활에서 배운 속도와 횟수
임진모 음악평론가. 전 경향신문 출판국, 내외경제신문 기자
6년 7개월의 기자생활을 뒤로 하고 1991년 5월부터 음악평론가의 길로 들어섰다. 현직 언론계 종사자 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답답한 기자‘질’에 숨이 막혀 하루라도 빨리 이 생활을 접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꿈은 오로지 하나, 음악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평론가가 안 되면 음악 스튜디오에서 청소하는 일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만두기 전까지 주간지와 경제신문에서 일하면서 상당한 양의 기사를 썼다. 기자든 평론가든 기본은 ‘글쓰기’였기 때문에 잠깐 기자생활을 하더라도 글쓰기에는 나름 신경을 기울였던 것 같다. 한 선배는 쉴 새 없이 써대는 나를 두고 ‘기사공장’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솔직히 신문사에 사표를 내고 싶었던 이유는 음악평론에 대한 오랜 로망과 더불어 많은 기사 처리에 대한 염증도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음악 관련 글이 아닌 한, 신문에 글쓰기가 너무 지겨웠고 싫었다.
기자라는 꼬리표를 떼고 나서 그토록 원하던 음악 글쓰기에 집중하니 글에 대한 물림증이 말끔히 가셨다. 하지만 이런 해방감도 잠시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프리랜서 생활 3년차에 발간한 책이 약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이곳저곳에서 청탁이 밀려들어왔다. 다시 징그럽기 짝이 없는 ‘글 감옥’에 끌려들어갔다.
원고가 주 수입원이었기에 다작(多作)은 생계를 위해서라도 불가피했다. 문제는 시의성이 필수인 신문과 잡지마다 요청하는 글이 엇비슷하다는데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95년에 당대의 톱 가수 마이클 잭슨이 신보 <히스토리>를 냈을 때 무려 아홉 매체에서 앨범 평론을 청탁한 일이었다.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글로벌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때도 3일에 걸쳐 자그마치 열 군데 가까운 종이 및 온라인 매체에 글을 써야 했다.
유사한 얘기를 어떻게 미디어마다 글을 달리 써 차별화를 이룩할 것인가. 처음에는 벌컥 겁이 났고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쓰는 사람이 같은데 결국 평론 콘텐츠도 그게 그거 아닌가. 게다가 한 매체 글에 질질 매달릴 수 또한 없었다. 그랬다간 딴 글은 모조리 펑크를 내게 된다.
여기서 신문사 시절의 경험이 빛을 발했다. 누구보다 빨리 썼고 단 한 번도 마감 날짜를 어기지 않았다. 가끔 동료 평론가들이 그랬듯 ‘잠수’를 탄 적은 더더욱 없었다. 또한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에 다른 글의 진행과 배열을 통해 유사한 느낌을 피하는 ‘수법’을 발휘했다. ‘기사공장’이라는 말을 들었던 시절이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마도 기자 시절의 가장 큰 수확은 글에 대한 공포감을 지운 게 아닐까 한다.
한바탕 바쁜 일을 치르고 나면 항상 과거 기자생활 이력에 대해 스스로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때는 그렇게 기자라는 직업이 싫어 매일매일 때려 칠 생각만 했는데…. 결국은 나를 지금도 먹여 살리는 것은 결코 길지 않았던 6년 7개월의 기자생활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에 배운 것은 결국 속도와 횟수였다. 지금도 후배 평론가들에게 기회가 될 경우 진심어린 충고를 한다. 음악평론가는 속도와 횟수에 민감해야 한다고. 빨리 글을 써서 글 감옥에서 탈출해야 하고, 가능한 한 많이 쓰는 게 미덕이라는 얘기다. 사실 정성을 기울여 오래 쓴다고 명작이 탄생하지 않으며 자주 쓰지 않으면 글쓰기 역량도 차츰 녹슬고 결과적으로 퇴보한다고 믿는다.
음악평론가의 입지를 마련하고 분주한 일상을 확보한 원동력은 속도와 횟수가 가져온 승리라는 생각이다. 주변인들도 가끔 “어떻게 그렇게 단숨에 많은 글을 쓸 수 있느냐”며 경이를 표한다. 대답은 건조하다. ‘무조건 빨리 그리고 닥치는 대로 많이’ 쓰려고 노력한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이게 TV 뉴스와 연예정보 프로그램 인터뷰와 라디오 게스트 출연 때의 ‘말’에도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말에 관한 한 나의 원칙은 정반대로 ‘느리게 그리고 적게’지만(잘 지켜지지 않아서 걱정이다) 결국은 속도와 횟수의 틀에서 움직인다.
기자들의 기자생활 이후 사회 진출 외연도 갈수록 확장되고 있다. 여러 직업군에서 그 경험을 발전적으로 활용하고 있을 것으로 본다. 평론가도 그 중 하나일 텐데 기자생활의 경험이 가장 유용하게 구동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다. 원천은 바로 속도와 횟수다. 후배 평론가가 회의적으로 묻는다. “다 그렇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누구나 평론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평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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