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칼럼-이하경 중앙일보 주필] 한덕수는 ‘이재명’ ‘김건희’ 혐오 전쟁을 이겨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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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7회 작성일 2022-09-19 09:22본문
이하경 주필·부사장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두 번 지낸 사람은 백두진·김종필·고건·한덕수다. 경제관료 출신 백두진은 국회의장도 두 번이나 역임한 정치인이었다. 김종필은 3김 시대의 주역이었고, 고건도 대통령 출마를 꿈꾼 적이 있다. 행정가의 외길을 걸은 인물은 한덕수가 유일하다. 한 총리는 정치색 없는 경제관료이자 ‘행정의 달인’이었을 뿐이다.
압도적인 여소야대 구도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수사, 김건희 여사 특검 추진으로 여야가 포연(砲煙) 가득한 내전(內戰)에 돌입했다. 하지만 한 총리는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않는 특유의 열린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서울시장 선거 뒤 야당 후보였던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를 관저로 초청해 저녁을 함께하면서 낙선을 위로했다. 송 전 대표와 가까운 민주당 의원들도 동석했다.
윤 대통령 지원 속 규제개혁 올인
타협 잊은 정치인 부끄러워해야
소모적 내전은 누가 끝낼 것인가
한 총리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 전원도 초청해 만찬 모임을 갖는다. 노무현 정부의 국무조정실장·부총리·총리였을 때 민정비서관·수석이었던 전해철 위원장이 흔쾌히 응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한화진 환경부 장관도 함께한다. 여·야·정 협의체가 가동되는 셈이다. 지난주 기재위 소속 의원들에게도 같은 모임을 제안했지만 민주당이 고사해 국민의힘 의원들과 기재부 차관이 참석하는 자리를 가졌다. 한 총리는 다른 상임위 소속 여야 의원들도 차례로 만찬에 초대할 생각이다.
정치적으로 무욕(無慾)한 총리가 정권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적(敵)과 만나 허심탄회하게 민생을 논의하는 일은 역설적으로 차원 높은 정치행위다. 양보와 타협이라는 정치의 기본을 잊고 눈만 뜨면 상대를 악마화하는 직업 정치인들은 크게 부끄러워해야 한다.
한 총리의 최우선 과제는 규제개혁이다. 그는 “규제는 약자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한다. 규제개혁은 윤석열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이기도 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규제개혁은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제대로 했어야 하는데 재임 중 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한 총리와의 첫 주례회동에서 “규제개혁이 곧 국가 성장”이라고 강조했다. 장관들이 대통령에게 독대 보고를 할 때도 규제개혁 진행 상황을 매번 포함시키도록 했다. 리얼리스트인 대통령과 총리가 의기투합하면서 규제개혁은 자연스럽게 윤 정부의 핵심 어젠다가 됐다. 바람직한 일이다.
한 총리는 정부 18개 전 부처에 태스크포스를 만들었다. 민간 전문가와 현장 활동가 중에서 규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규제심판관 100명을 뽑았다. 한이헌·조원동 전 대통령경제수석, 서남수 전 교육부 장관, 김종갑 전 산자부 차관 등 33명을 자문단에 영입했다. 규제의 칼자루를 휘둘러 본 고위 관료 출신을 규제개혁의 전면에 내세우는 파격적인 역발상이다. 한 총리는 기업 현장을 부지런히 누비면서 “구두가 닳도록 뛰어다니겠다”고 했던 취임 전 약속을 지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스타 장관’도 발굴했다. 한화진 환경부 장관이다. 그는 정부가 모든 과정(process)에 일일이 관여하는 규제에서 최종 단계에 대해서만 확인하는 ‘사후(end of pipe)규제’로 패러다임을 바꿨다. 뛰어난 기술과 기계가 나와도 기업이 당장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나쁜 규제’의 악습을 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원칙이다. 대통령과 총리가 모두 격찬했다는 ‘한화진식 규제개혁’이 확산되면 산업의 비약적 성장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렇게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총리가 현장을 누비고 장관들을 독려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정치권에서는 죽기살기로 상대를 악마화하는 전면전이 벌어지고 있다. 전 세계가 사활을 건 기술전쟁에 돌입했고, 우리 글로벌 기업에도 비상이 걸렸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양향자 의원이 ‘호국신기(護國神器)’라고 표현한 반도체의 기술패권을 지키기 위한 ‘K칩스법’(반도체특별법)은 발의된 지 40일이 지나도록 상임위에 상정조차 되지 않고 있다. 단 한 줌의 권력이라도 더 차지하는 것만이 못난 정치의 유일한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미국 의회와 행정부가 520억 달러를 지원하는 반도체지원법, 자국 전기차를 지원하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속전속결로 처리한 것과는 정반대다.
윤 정부는 이념에 치우쳐 현실을 무시했던 과거 정부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내각이 총동원돼 규제개혁에 나서고, 소득주도성장·탈원전의 오류를 바로잡고, 친중·친북 굴종외교에서 탈피해 한·미 동맹을 복원하고 있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로 헝클어진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대통령이 전력투구했고, 33개월 만의 한·일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강제징용 피해 할머니를 찾아가 무릎을 꿇는 진정성을 보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아직도 속시원한 돌파구는 열리지 않고 있다. 낡은 정치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모적인 내전은 즉시 소멸되고 대통령은 정쟁과 무관한 초월적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 통합과 협치로 민생에 숨통이 트이는 진정한 정치의 순간을 누가,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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