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칼럼-김영희 한겨레 편집인] 김민기 그리고 세상의 모든 ‘뒷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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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7회 작성일 2024-05-07 14:55본문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인간이 존중받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김민기는 그 가치를 자신의 삶에서 결벽일 정도로 지켜왔다. 외치거나 자신의 잣대로 남을 비난하지 않았다. 과거의 업적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이념가나 운동가는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진보적인 존재가 이런 ‘뒷것’이 아닐까.
김영희 | 편집인
지난달 암으로 세상을 떠난 홍세화 선생의 장례식장에서 그에게 미리엘이라는 세례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난해 12월 홍세화 친척의 요청으로 성공회 이대용 신부가 사회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인 그를 찾았다. 세례를 받겠냐는 물음에 한참 망설이던 홍세화는 ‘레미제라블’에서 은촛대를 훔쳐 도망간 장발장을 감쌌던 미리엘 주교의 관용의 정신이 자신을 이끈 신념이었다는 말을 꺼냈다고 한다. 노동자나 가난한 이들과 늘 함께 했던 그의 삶과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이영구 목사 또한 인상적이었다. 해외여행이 흔치않던 시절, 자수성가한 서울대 출신 사업가로 출장이 잦던 그는 친구 박호성(전 서강대 교수)으로부터 프랑스 파리의 홍세화를 한번 찾아가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1986년 센강변에서의 “운명적 만남” 이후 그는 평생의 벗이 됐다. 홍세화가 해외에서 근무 중이던 1979년 10월 내무부가 발표한 남민전 사건으로 망명객이 된 뒤 생계를 위해 야간 택시운전을 할 때, 이영구 부부는 해마다 두차례씩 한국 음식을 싸들고 고립된 생활을 하던 홍세화 가족을 찾았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나오는 데는 임진택·유홍준 같은 벗들의 권유와 출간 알선과 함께, 몇년간 운전을 멈추고 글을 쓰도록 생활비를 대준 이영구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그런 이영구지만 자신을 내세우지도, 자신의 신앙을 권유하지도 않았다. 발인날 아침 가족과 몇몇 지인에게 이 신부를 소개하며 그는 “수십년을 곁에 있었는데도 거절당할까봐 한번도 종교를 권하지 못했는데”라며 웃었다. 이영구는 40대 후반 잘 나가던 사업을 접고 중증장애인을 돌보고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목사가 되어 살아오고 있다.
1970년대 홍세화 부부의 집을 드나들던 이들 가운데엔 김민기도 있었다. 에스비에스(SBS)가 최근 방영한 다큐멘터리 3부작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를 보면서 이 세상의 많은 ‘뒷것’들을 떠올렸다. 홍세화도, 이영구도 그런 존재이리라.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후반은 행진곡풍의 ‘전투적’ 민중가요 신곡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런데 왠지 난 ‘이 세상 어딘가에’ ‘강변에서’ 같은 노래가 좋았다. 김민기 노래는 당시 민중가요와 다른 결이 있었다. 다큐를 보며 새삼 깨달았다. 앞것이 아니라 뒷것을 자처한 그는 권력에겐 ‘반정부 좌익’이었지만 그 바탕엔 사람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2015년 이진순과 했던 한겨레 인터뷰에서 김민기는 70년대 보안사 취조실에서 ‘죽도록’ 맞던 당시,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싶어...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나중에 운동권 후배들에게 “너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게 되면 걔 닮게 된다”고 말했다고도 했다.
다큐를 통해 새삼 알게 된 사실도 적잖다. 1979년 전두환의 12.12 쿠데타가 나던 날, 그는 달동네 아이들의 공공어린이집 설립 모금공연을 위해 정권의 탄압 속에 아예 몇년간 손에서 놓았던 기타를 다시 잡았다. 암울했던 1978년 송창식이 노래굿 ‘공장의 불빛’ 녹음실을 빌려주고 녹음까지 해줬다는 이야기엔 많은 사람들이 놀랬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 들불야학을 운영하다가 과로에 연탄가스중독 사고로 숨졌던 전남대 학생 박기순의 영결식에 김민기가 나타나 ‘상록수’를 불렀다는 것도 그랬다. 나중에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했던 윤상원은 서울에서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노동운동을 위해 내려와 들불야학에 참여했다. 박기순도, 오월 광주 당시 죽음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았던 시민군대변인 윤상원도 편하게 사는 ‘앞것’이 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뒷것’이다.
70년대 유신의 ‘입틀막’ 시대에 대학과 공장, 탄광에서 김민기가 만든 노래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의 입길을 틔웠다. 90년대 이후 학전의 실험을 통해선 연극을 하거나 인디음악을 하면 밥굶는 게 당연시되던 시스템을 바꿔냈다. 가수, 배우뿐 아니다. 유홍준(명지대 석좌교수)은 “90년대 운동판에서 내 강연을 다 헐값이나 공짜로 불러댈 때 처음 제대로 계약서를 쓰고 정산을 해준 게 김민기”라는 얘기를 종종 한다. 김민기는 2008년 장기흥행 중이던 ‘지하철 1호선’ 공연을 중단하고 아동극을 시작한 이유를 “돈되는 일만 하다보면 돈 안되는 일을 못할 것 같아서”라고 말하곤 했다.
김민기라고 왜 단점이 없겠는가. 하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인간이 존중받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김민기는 그 가치를 자신의 삶에서 결벽일 정도로 지켜왔다. 외치거나 자신의 잣대로 남을 비난하지 않았다. 과거의 업적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그 치열함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누구나 앞것이 되고 싶어하고 앞것에 환호하는 시대이지만 우리 사회 한 구석엔 그런 이들이 있다. 홍세화가 마지막 한겨레 칼럼에서 쓴 “진보나 좌파를 말하는 것과 진보나 좌파로 사는 것은 다르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스스로 말하듯 김민기는 이념가나 운동가는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진보적인 존재가 이런 뒷것이 아닐까.
많은 자료영상을 사용한 다큐인데도 그의 최근 모습이 나오는 장면에선 카메라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가 허락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김민기는 끝까지 뒷것이다.
원문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3939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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