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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칼럼-최미화 대구일보 편집인 겸 이사 편집국장] 문향 만리) 하얀 레퀴엠 / 김나비

작성일 24-12-1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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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소리가 구워지고 연기가 차오르면/ 머리 푼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아요/ 누구의 노래일까요, 뜨겁게 피는 동백은// 삶의 미련이 만개해도 밖으론 나갈 수 없죠/ 쿨럭이는 리듬을 명치에 쟁여두고/ 늑골에 고인 기억은 건반처럼 눌러봐요// 바람은 매운 침묵의 음역을 넘나들겠죠/ 이유도 없이 후렴처럼 따라붙는 죄의 이름/ 붉은 꽃 툭 떨어지면 흔적 없이 지워질까요// 굴속은 안온한 덫 하얀 올무가 피어나죠/ 휘영청 달빛 아래, 섬 그늘이 먹피 흘리면/ 새까만 다랑쉬굴에 아픈 선율이 익어가죠
『가람시학』(2024, 제15호)
「하얀 레퀴엠」은 시조로 쓴 위령곡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제주 4·3사건이다. 묘한 호소력을 가진 시편이다. 숨소리가 구워지고 연기가 차오르면 머리 푼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는다고 한다. 숨소리조차 구워지다니 이 무슨 변고인가? 그러면서 화자는 개화를 바라보면서 누구의 노래일까요, 뜨겁게 피는 동백은, 이라고 반문하고 있다. 동백이 뜨겁게 필 수밖에 없는 연유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얼마나 가슴 저미는 일인가? 삶의 미련이 만개해도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고 노래한다. 정말 그렇다. 영영 불가능한 일이다. 쿨럭이는 리듬을 명치에 쟁여두고 늑골에 고인 기억은 건반처럼 눌러보라고 말한다. 바람은 매운 침묵의 음역을 넘나들겠지만, 이유도 없이 후렴처럼 따라붙는 죄의 이름이 붉은 꽃 툭 떨어지면 흔적 없이 지워질 것인지 다시 묻는다. 절박하고 통탄스러운 질문이다. 애당초 답이 없는 물음이다. 화자는 굴속은 안온한 덫 하얀 올무가 피어난다고 하면서 휘영청 달빛 아래 섬 그늘이 먹피 즉 멍들어 검게 죽은 피를 흘리면 새까만 다랑쉬굴에 아픈 선율이 익어가고 있다고 진술한다. 「하얀 레퀴엠」은 제주4·3사건과 관련된 최근 시조 중에 오래도록 눈길이 가는 작품이다.

김나비 시인은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합목리’라는 시조를 통해 노래하고 있다. 합목리는 충북 진천군 산수산업단지 근처 중앙아시아 출신 노동자들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젖은 발소리 끌며 어둠이 스며드는 밤 무거운 하루 짊어진 사람들이 돌아오면 삐거덕, 달방 쪽문이 하나씩 열린다. 곤한 냉장고 소리가 진한 고요를 삼키고 얇은 벽 사이에 두고 익어가는 다국적인 밤하늘엔 각자의 꿈이 빼곡하게 반짝이는데 수많은 언어로 풀어놓는 잠꼬대 속 익지 못한 이야기들이 뒤척이며 코를 골고 달빛이 고향 소식을 살며시 부려놓는다. 이렇듯 애절한 시편이다.

요즘은 다문화 시대다. 지구촌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다. 서로 돕고 살피며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 ‘합목리’라는 시조가 그것을 잘 일러주고 있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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