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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칼럼-정용관 동아일보 논설실장] 무정부 상태를 원하나

작성일 25-03-1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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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역할 포기하고 ‘법대로’ 하자더니
헌재 판단마저 부정하면 나라는 어디로…
인용-기각 여부만큼 중요한 건 공화정 유지
‘광기의 시간’ 지나면 국민 심판의 시간 올 것

정용관 논설실장
정용관 논설실장

어릴 적 동네 축구에선 심판이 없어도 별 탈 없이 경기를 잘 치렀다. 어설펐지만 나름의 게임 규칙이 작동했다. 그런데 서로 반칙이네 아니네 떼를 쓰고 우기기 시작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언젠가부터 우리 정치는 동네 축구만도 못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정치의 기능이 마비된 것이다. 여든 야든 법조인 출신이 많아진 탓인지 정치로 해결할 문제를 ‘법대로’ 하자며 외부 심판을 찾기 일쑤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오면 환호하고 불리한 판결이 나오면 비난한다. 시민사회와 연계해 광장에서 세 대결을 펼치고 ‘정치 훌리건(hooligan)’이 판을 치는 지경까지 왔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언제 어떻게 날지 불확실한 상황이 지속되자 이런 ‘무(無)정치’ 상황은 더욱 첨예화하고 국민의 ‘불안 지수’도 상승하고 있다. 누구는 “대통령이 다시 용산에 복귀하면 나라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며 불안해하고, 누구는 “헌재마저 불복 세력에 침탈되면 어쩌나”라고 불안해한다. 어떤 사람은 “일단 각하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시한을 정해놓고 물러나면 좋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럴 사람이면 이런 사태가 오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12·3 계엄 선포 후 100일이 훌쩍 넘는 동안 우리의 민주적 복원 능력에 심각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대통령 체포를 둘러싼 물리적 대치와 법원 난동 등 전례 없는 사건이 이어진 것도 불안불안한데 “탄핵심판 결과가 내 생각과 다르면 수용하지 않겠다”는 응답이 42%에 달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까지 나왔다. 헌재에 대한 신뢰도가 타 기관에 비해 여전히 높지만 우려되는 수치다. 헌재의 미숙함도 있었지만 극단 유튜버 등의 의도적인 불신 조장은 아주 위험한 짓이다.


영국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제시한 통찰이 떠오르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헌재의 모든 결정이 곧 진리(眞理)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재의 결정이 권위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국체(國體) 유지를 위한 헌법적 사회계약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민주 국가에서 선거 결과를 부정하면 대의제가 유지될 수 없듯이, 헌재 결정을 부정하면 헌정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은 홉스가 말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무정부 상태로 가자는 말밖엔 되지 않는다.

헌재 변론 과정을 거치며 숱한 논란과 공방이 있었다. 내란죄를 뺀 탄핵소추안 변경이 정당한지 아닌지 등 그 논란의 과정과 내용을 다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내란 혐의로 기소된 현직 대통령의 파면 여부를 결정하는 초유의 상황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헌재가 이런저런 시비를 자초한 점들도 있다. 이 또한 백서에 남겨야 할 것이다. 다만 언제까지 불확실한 혼란 상황을 지속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이번 계엄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헌법 1조 1항을 본질적으로 훼손했는지에 대한 헌재 재판관들의 판단이 곧 나올 것이다. 국민도 그 결과를 존중해야 대한민국 주권자(1조 2항)로서의 자격이 있다. 이게 허물어지면 그 자체로 공화정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극단적 지지층, 팬덤을 넘어 훌리건 행태까지 보이는 일부 전위대의 행태는 실로 우려스럽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편향된 유튜브 알고리즘에 갇힌 군중을 향한 정치권의 무책임한 선동이다. 윤 대통령 측은 반국가 세력과의 전쟁, 악의 우두머리 척결 등 내전 심리를 부추긴다. 줄탄핵, 입법 폭주, 예산 일방 처리 등 작금의 헌정 위기 사태에 책임이 적지 않은 민주당도 수구 반동 세력과의 전쟁을 외친다. 이러니 정치권에 환멸을 느낀 중도층에서 일관되게 탄핵 찬성 여론이 높지만 야당 지지를 유보하는 흐름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윤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가 스스로 무대에서 사라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조기 대선이 실시되더라도 순탄하게 선거가 관리될 수 있을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두 사람의 문제가 뒤엉켜 온 나라가 오도 가도 못 하는 정치적 그리드록(gridlock)에 걸린 것 같다. 그러나 꽉 막힌 교착상태일수록 탄핵은 탄핵대로, 재판은 재판대로 순리대로 풀어갈 필요가 있다.


국가적 위기가 클수록 우리 국민은 사태 해결의 궁극적 심판자로서 집단지성을 발휘해 왔다. 위태로운 헌정을 바로 세울 세력이 어느 쪽인지 다수의 국민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광기의 시간’이 지나면 윤 대통령도, 이 대표도 각각의 이유로 ‘정치의 심판대’에 오를 것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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