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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 칼럼/12.9] 나라의 명운을 베팅할 순 없다

작성일 13-12-1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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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 부통령의 ‘베팅’ 발언, 미국선 자주 쓰는 말이라지만

우리에겐 ‘줄 잘 서라’는 말로 들려

방공식별구역 한미중일 각축… “힘 있어야 국익 지킨다”는 사례

세상은 한국중심으로 돌지 않는데 자타공인 위상 높일 방안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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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 논설위원실장



생각은 자유지만 표현은 자유가 아니다. 표현이 오해를 빚는다면 1차적 책임은 화자(話者)에게 있다. 처음 이해한 뜻이 나중의 해명보다 사실에 더 부합하는 경우도 많다.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 “미국은 계속 한국에 베팅할 것”이라거나 “미국 반대편에 베팅하는 건 좋은 베팅이 아니다”라고 한 말은 그래서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바이든 부통령의 발언은 초강대국 미국만이 판을 짤 수 있고, 중국이 새판 짜기에 나섰으며, 한국은 독립변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사실이라고 해서 모두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건 외교의 상식이다. 바이든 부통령의 발언에는 60년 동맹국의 자존심에 대한 배려가 결여돼 있다. 한국에 ‘줄 똑바로 서라’는 뜻이냐고 수군거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부통령의 발언이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재균형 정책에 대한 추진 의지나 능력을 강조할 때 자주 쓰는 말이라고 해명했다. 이해가 간다. 그러나 평범한 한국인은 ‘베팅’이라는 단어에서 미국의 외교전문가들이 말하는 ‘전략적 선택’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그 대신 도박과 관련된 요행, 허세, 지르기 등을 연상한다. 나라의 명운을 ‘베팅’할 수 없는 이유다.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는 한미중일, 네 나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선 사건이다. 손에 잡히는 갈등인 데다 양보가 불가능한 영토 주권과도 겹치는 바람에 더 뜨거워졌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이 중국에 대항해 세게 ‘베팅’해줄 것을 바랐다. 그러나 기대는 빗나갔다.



방공식별구역을 둘러싸고 보름 동안 벌어졌던 씨름판의 유일한 승자는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 중국이다. 미국 정부가 거듭해서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을 인정하거나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 말을 에누리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분명해진 것은 중국은 방공식별구역을 철회할 뜻이 전혀 없으며, 그들의 의도대로 방공식별구역은 기정사실이 됐다는 것이다.



미국이 곧바로 폭격기와 핵추진 항모를 남중국해로 보낼 때만 해도 미국이 끝까지 ‘베팅’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일찌감치 “중국 포용에 공을 들이는 오바마 행정부가 중국에 쓴소리를 해가며 압박할 개연성은 크지 않다”고 내다봤다. 바이든 부통령도 순방 직전 아사히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일중) 양국이 위기관리 및 신뢰 조성을 위한 여러 조치를 확립하는 데 합의할 필요성이 명확하게 드러났다”고 하는 데 그쳤다. 중국 방공식별구역에 대한 미국의 방침은 원상회복, 즉 ‘철회’가 아니라 ‘위기관리’로 바뀌었다고 보는 게 맞다.



일본은 그런 미국에 대해 섭섭하다. 미국이 자기들과 손잡고 ‘선수’로서 중국에 맞서 주길 원했는데 갑자기 ‘심판’으로 돌아선 때문이다. 일본은 수전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조지타운대 연설(‘아시아에서의 미국의 미래’)을 듣고도 살짝 실망했다. 향후 3년간 미국의 아시아정책을 담은 중요한 연설이었는데 압도적으로 중국에 대한 언급이 많았고 내용도 대단히 유화적이었다. 일본이 더 아팠던 대목은 일중 영토 분쟁에 대해 미국이 평소 하던 수준의 일본편도 들지 않고 엄격히 중립을 지켰다는 것이다. 이 연설 이틀 뒤에 중국은 일방적으로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했다. 미국은 당황했고 황당했다.



그렇지만 이 문제로 미일의 갈등이 깊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베 신조 총리 재집권 이전 민주당 정권 3년 동안에 빚어졌던 미일 갈등은 거의 봉합됐고, 대부분의 국면에서 순풍이다. 아들 부시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찰떡궁합’ 시절이 다시 온 것 같다.



문제는 한국이다. 한국의 방공식별구역 확대에 미국은 내심 반대하지만 하기로 했다니 인정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중국도 일본도 떨떠름하다. 미국 중국과의 화기애애한 정상회담도 막상 국익이 걸리면 별 효험이 없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최근 1년간 중국과 일본의 벌어진 틈새를 이용해 알게 모르게 중국과 동조해온 듯한 외교도 한계를 드러냈다. 그간의 선전은 평가하지만 ‘당당한 외교’는 지금부터다.



원하지 않아도 베팅을 하려면 판돈이 필요하다. 우리도 웬만큼 판돈을 갖고 있다고 내심 자부해 왔다. 그런데 큰손들의 평가는 매우 박하다. 어떻게 판돈을 불려 ‘판’의 주역이 될 것인가. 나라의 명운이 걸린 베팅을 강요받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고차방정식을 붙들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공복이 있기는 있는 건가. 방공식별구역을 둘러싼 ‘보름 전쟁’이 우리에게 던진 숙제다.



심규선 논설위원실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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