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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칼럼/1.2] 神山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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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841회 작성일 2013-01-03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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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중국의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의 장인이 된 양창지는 1903년 32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일본 유학을 떠나며 비장한 각오를 담은 글을 남겼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교육에 뜻을 둬 왔다. 세계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사회를 지도하는 책임을 지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해 배움을 구하러 유학길에 오른다.’ 아시아를 지배해온 중국이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치욕의 패배를 당한 뒤였다. 중국 지식인들은 울분을 삭이며 일본의 선진 문물과 지식을 배우려 했다. 이들은 일본 유학을 ‘신산(神山·선인들이 사는 곳)’을 찾아 떠나는 일로 표현했다. 서구의 침략에 맞서 중국을 지킬 신비의 묘약을 구하러 가는 일에 비유한 것이다.



양창지는 10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친 뒤 고향인 후난 성에 돌아가 젊은이들에게 서양 사상과 학문을 가르쳤다. 제자 중에는 마오쩌둥이 있었다. 그의 제자들로 구성된 신민(新民)학회는 나중에 중국 공산당의 모태가 된다. 양창지와 같은 중국의 일본 유학생은 1905년 1만 명에 달했다. 1911년 신해혁명을 일으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쑨원, 계몽사상가 량치차오, 중국의 문호로 꼽히는 루쉰은 모두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했거나 유학했던 인사들이었다.0\"



조선의 지식인들도 일본 유학에 가세했다. 1881년 해외 문물과 제도를 견학하기 위해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떠났던 유길준 윤치호는 그대로 일본에 남아 공부했다. 1883년에는 서재필을 포함한 14명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1895년에는 조선의 유망한 청년 150여 명이 일본에 관비 유학생으로 파견됐다.







한국과 중국의 젊은이들이 일본으로 모여든 것은 아시아의 새로운 문화 중심지로서 확고한 위치 때문이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찍 근대화에 착수한 일본은 서양의 선진문화를 적극 받아들였다. 해외 서적들이 번역되면서 자유주의 개인주의와 같은 근대 사상과 문예사조들이 소개됐다. 1870년 일본 최초의 일간신문이 간행됐고 1874년에는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이 시작돼 국회 설립이 논의됐다. 조선이 쇄국정책을 고집하며 어둠 속에서 문을 닫고 있던 시절이었다. 1889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헌법이 제정됐다. 이웃나라 지식인들이 가장 부러우면서도 두렵게 느꼈던 것은 동아시아의 문화를 주도하는 일본의 힘이었다.



새해부터 일본을 이끌게 될 아베 신조 총리는 과거사와 관련해 일본 정부가 그나마 진전된 사과의 뜻을 표시했던 고노 담화(1993년)와 무라야마 담화(1995년)를 수정하겠다는 뜻을 지난해 8월 밝힌 바 있다. 그제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과거사에 대한 새로운 담화를 내놓겠다고 말했다. 이른바 ‘아베 담화’가 언제 나올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아베 총리의 극우적 역사관으로 미루어 볼 때 그 내용은 과거사 사과의 수위를 고노 담화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이 될 공산이 크다. 이 경우 한국 중국과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것이 분명하지만 담화 수정과 번복이 초래할 또 다른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 19세기 후반 이후 아시아를 대표해온 지성과 문화 중심지이자 발신지(發信地)의 위상을 일본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다.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 동원을 인정했던 고노 담화는 김학순 할머니의 피맺힌 절규가 이끌어냈다. 1991년 광복절을 앞두고 김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이전까지 전쟁에 참가했던 일본 군인들은 누구나 위안부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모른 척했고 스스로 위안부였다고 밝히고 나선 여성은 없었다.



“제 인생은 열여섯 꽃다운 나이로 끝났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한을 풀지 못해서입니다. 제 청춘을 돌려주십시오.” 김 할머니의 호소는 요시미 요시아키라는 일본 학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가 발로 뛰어다니며 찾아낸 일본 방위청의 위안부 관련 공식문서 6건이 이듬해 공개되자 일본 정부는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료들이 폐기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은 연합군의 공습을 피해 다른 곳의 지하창고에 옮겨 놓았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많은 비밀자료들을 전쟁 막바지에 소각했지만 이 문서는 패전 뒤 연합군에 바로 인계돼 햇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 일각에선 “문서 안에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내용이 없지 않느냐”며 “증거가 있으면 내놓아 보라”고 한다.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고백 이후 다른 여성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네덜란드 정부 보고서 등 새로운 자료들이 제시됐다. 무엇보다 수치를 무릅쓰고 전면에 나선 생존인물 이상으로 확실한 증거가 또 있을까. 아베 정권은 마지못해 인정했던 고노 담화조차 되돌리려 한다. 역사와 진실을 거부하는 모습에서 근대 지식인들이 선망했던 일본은 아득하게 사라지고 없다.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에 일말의 기대를 걸 수 있는 희망의 끈은 아직 남아 있다. 집권 자민당의 지지율은 34.3%에 불과하다. 자민당의 역사인식에 동의하지 않는 일본인이 많았으면 한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전성시대를 위해 일본의 지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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