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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영 칼럼/11.3] 빚더미 인생들이 뭉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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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872회 작성일 2012-11-0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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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금융사들, 월급쟁이·영세업자에 대출 공략

그 결과가 \'가계 부채 1000조원\'… 부채 무게 버겁고 인구 많아지자

채무자들 집단행동 하기 시작… 한국 경제, 한 번은 꼭 털고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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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img_caption.jpg\" 송희영 논설주간



일본인들에게 \'히노구루마(火車)\'는 죄지은 사람이 지옥으로 갈 때 타는 운명의 불수레다. 20년 전 일본 경제가 최고조에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던 무렵 \'화차\'라는 추리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빚더미에 찌들려 사는 다중(多重)채무자를 그린 작품이다.



화차는 작년에 일본 원작(原作)을 토대로 국내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가계부채 1000조원\'이 한국판 화차가 탄생한 경제적 배경이다. 여자 주인공은 이 시대의 맨 밑바닥을 훑으며 살아왔다. 그는 \"나 사람 아니야, 나 쓰레기야\"라고 외친다. 자기가 사랑했고 자기를 사랑했던 남자를 향해서.



며칠 전 갖고 있는 부동산을 팔고 정기예금과 적금·보험을 몽땅 다 깨도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가구가 10만명이 넘는다는 통계가 나왔다. 신용카드를 긁어 쓰고 제날짜에 막지 못하는 사람은 48만명이고, 임대아파트의 임대료를 미루고 있는 집은 12만이다. 금융회사 3곳 이상에서 대출금을 갖다 쓴 다중채무자는 316만명이다.



이들은 금융회사의 전산망 안에 숫자로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들이 세상으로 나와 집단화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한번 올라타면 내릴 수 없다는 저주의 화차에서 내려보겠다고 뭉치고 있다. 이들을 돕는 사람들이 두 달 전에는 \'빚을 갚고 싶은 사람들(빚갚사)\'이라는 조직을 출범시키더니 \"갚고 싶어도 못 갚는 건 내 책임이 아니다\"고 선언했다. 자기들끼리 화차 영화를 함께 보며 단합하는 자리가 만들어지고, 전문가들은 이들을 구제해야 할 논리를 정리한 책(제윤경·이헌욱)과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법을 조언하는 책(백정선·김의수)을 발간했다.



개인 채무자들이 조직화하는 것은 이들이 집단을 이룰 만큼 부채에 짓눌린 인구가 많아진 데다,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정도로 부채의 무게도 버거워졌기 때문이다. 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끼리 모여 탈출구를 찾아보자며 무리를 짓고 있는 셈이다.



정부나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개인 채무자 집단이 형성된다는 소식이 반가울 턱은 없다. 빚 갚을 생각은 안 하고 발부터 뻗으려는 심보가 얄미울 것이다. 금융회사들이 \'약탈적\' 대출 마케팅을 펼치는 바람에 빚이 늘었다고 책임을 은행에 미루는 주장에도 욕설이 튀어나올 만큼 반감(反感)을 느낄 것이다. 어르신네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대출금을 갚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않는다고 분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정권은 개인 채무 문제를 경제정책의 핵심 과제로 다루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도달했다. 10여년 동안 가계부채는 2배 이상 증가했고 저축률은 최하위로 떨어졌다. 부채의 바위 덩어리를 머리에 얹고 사는 가구가 전체의 6할이 넘다 보니 노후(老後)를 걱정하며 씀씀이가 줄어들고 있다. 불경기에 휘말리면 모두 지갑을 한꺼번에 닫는 바람에 경기후퇴 속도가 과거보다 빨라졌다. 개인 부채가 경제의 큰 흐름에 뒷다리를 걸며 성장 가도(街道)의 장애물로 등장하고 말았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엔 기업 부채가 골칫거리였다. 그때 기업 부채를 처리하느라 고생했던 금융회사들은 그 후 15년 동안 기업을 성장시키는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뒤로 미룬 채 월급쟁이와 영세 자영업자를 상대로 대출 마케팅을 본격화했다. 주택을 담보로 대출금을 내주고 신용카드를 대량 발급해 빚을 쓰라고 세일즈하는 전략을 밀어붙였던 것이다.



은행들이 집중 공략하는 고객층을 바꾸자 고도성장기에는 은행 대출이라고는 구경도 못하던 개인 고객들이 은행 창구로 몰려갔다. 만나기 힘들던 대출 담당 은행원이 미소로 맞아주는데 한 번 놀라고, 친필(親筆) 사인 몇 번으로 수천만~수억원을 그 자리에서 통장에 입금해주는 데 또 한 번 놀랐다. 그렇게 금융회사 영업과 빚 무서운 줄 모르는 채무자들의 손뼉이 잘 맞아떨어진 출산물이 바로 가계 부채 1000조원이다.



이제 와서 정부와 은행들이 빚 상환은 채무자가 자기 책임 아래 마무리해야 한다고 정색해봤자 해결되지 않는다. 모럴헤저드(도덕적 해이)를 들먹이며 버릇 잘못 들인다고 한탄한들 문제가 덮이는 것도 아니다. 채무자 수만 명이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대출 상환을 거부하고 길거리에 드러누우면 어차피 뒷수습 책임은 정부와 금융회사들에 떨어질 것이다.



IMF 위기 이후 은행과 재벌·저축은행들의 부채를 처리하는 데 국민 세금을 250조원 이상 썼다. 1993년부터 국내 농업시장을 개방하기 시작한 이래 농민 부채를 탕감해주는 데도 200조원이 넘는 예산을 지출했다. 샐러리맨·자영업자들만 불붙은 \'부채 마차(馬車)\'를 타고 지옥으로 들어가라는 법은 없다. 한국 경제가 다음 도약을 위해서는 개인 부채의 짐을 한 번은 털고 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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