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8.17] 일본을 진정 이기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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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6,685회 작성일 2011-08-17 09:25본문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임진왜란 직후와 닮은 한국 상황
조선의 북쪽에는 나중에 중국 대륙에 청나라를 세우게 되는 여진이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며 조선을 위협하고 있었다. 중화 질서에 편입돼 있던 조선에 세계의 중심은 중국 대륙이었다. 명나라를 대체하는 청나라의 부상은 오늘날 중국이 ‘G2’로 떠오르며 세계의 권력 지형을 바꾸고 있는 것과 유사한 충격파를 조선에 던지고 있었다. 세계의 패권국이 교체되는 격동기였다. 조선으로서는 남쪽에 일본, 북쪽에 여진이라는 두 개의 적(敵)을 지닌 형국이었다. 바다 건너에 있는 일본과는 일단 강화를 모색하고 국경이 인접해 있는 여진에 대비하자는 것이 조선의 결론이었다.
‘7년 전쟁’으로 불리는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입은 피해는 막대했다. 조선 인구 500여만 명 가운데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에 납치된 조선인은 일본 자료로는 5만∼6만 명, 우리 학계 추정으로는 10만 명에 이르렀다. 일본 군대가 왕릉인 선릉과 정릉을 마구 파헤친 것에 조선 왕조와 지식인들은 극심한 모멸감을 갖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은 조선의 생령(生靈)을 함부로 죽이고 능침(陵寢)을 파헤친, 영원토록 복수해야 하는 원수’라는 대목이 나온다. 광해군은 “일본과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요즘 반일(反日)정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개심과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을 때였다.
조선은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는 국가였다. 국교 재개에 조선 선비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선비 윤안성은 ‘(일본에 의해 파헤쳐진) 선릉과 정릉의 소나무와 잣나무에서는 가지가 자라지 않는다’며 울분을 토로했다. 그러나 일본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게 조선의 현실이었다. 임진왜란에 대한 반성의 기록인 ‘징비록’을 쓴 유성룡은 ‘일본군은 독살스럽고 사나운 데다 돌격전에 능해 조선군이 능히 대적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임진왜란 때 일본과 싸웠던 명나라조차 ‘일본은 병기가 날카로우며 목숨을 가볍게 여겨 전투에 익숙하고 물산이 풍부하다’며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다. 조선은 논란 속에서 임진왜란이 끝난 지 9년 뒤인 1607년 일본에 통신사 사절을 보내면서 외교 관계를 복원하게 된다.
문화强國 이룩해 의연한 대처를
하지만 조선은 문화적 측면에서는 일본에 대해 우월의식이 대단했다. 1811년까지 12차례 파견된 조선통신사 사절들은 문화를 통해 일본을 교화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일본도 한국의 유교 문화를 높이 평가했다. 통신사가 방문하는 곳마다 조선 사절단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이들은 조선 선비들에게 자신이 쓴 한시(漢詩)에 대한 평을 들으려 했고 자녀 이름을 지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통신사가 지나는 길목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와 행렬을 지켜보는 장관이 연출됐다. 요즘 한류와는 다른 성격의 한국 문화 열풍이 일본에서 일어났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거쳐 1965년 한일 관계가 정상화된 이후에도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강한 반발 속에 국교가 재개되는 과정도 임진왜란 직후와 비슷했다. 일본이 우호와 반성을 내세우면서도 역사 문제 등 이익이 충돌하는 이슈에 대해서는 돌변하는 모습을 보이는 점도 그렇다. 임진왜란 직후에도 일본은 청나라 세력의 위협으로 조선이 곤경에 빠지자 그 약점을 이용해 무역과 외교 면에서 이익을 챙기는 데 골몰했다. 조선은 국교 재개 이후 안보를 이유로 일본 사절들이 서울까지 올라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진이 만주 지역을 평정한 뒤인 1629년 일본이 상경(上京)을 요구해오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오늘날 일본에서 한국에 우호적이라고 하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독도와 과거사 문제 등에서는 아무 변화가 없다. 앞으로도 일본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일본의 도발을 극복하려면 독도에 해병대를 배치하는 식의 감정적 즉흥적 대처로는 불가능하다. 중국이 초강대국으로 복귀한 현실은 우리의 진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일본과 중국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문화적 역량을 높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명나라가 ‘야만족’ 청나라에 멸망하자 조선은 명나라 대신에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해내겠다고 자임했다. 국가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우는 일이 물론 중요하다. 현대 한국이 문화적, 지적 역량을 높인다면 길은 훨씬 분명해진다. 한류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일본의 식민 지배를 거쳐 1965년 한일 관계가 정상화된 이후에도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강한 반발 속에 국교가 재개되는 과정도 임진왜란 직후와 비슷했다. 일본이 우호와 반성을 내세우면서도 역사 문제 등 이익이 충돌하는 이슈에 대해서는 돌변하는 모습을 보이는 점도 그렇다. 임진왜란 직후에도 일본은 청나라 세력의 위협으로 조선이 곤경에 빠지자 그 약점을 이용해 무역과 외교 면에서 이익을 챙기는 데 골몰했다. 조선은 국교 재개 이후 안보를 이유로 일본 사절들이 서울까지 올라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진이 만주 지역을 평정한 뒤인 1629년 일본이 상경(上京)을 요구해오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오늘날 일본에서 한국에 우호적이라고 하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독도와 과거사 문제 등에서는 아무 변화가 없다. 앞으로도 일본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일본의 도발을 극복하려면 독도에 해병대를 배치하는 식의 감정적 즉흥적 대처로는 불가능하다. 중국이 초강대국으로 복귀한 현실은 우리의 진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일본과 중국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문화적 역량을 높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명나라가 ‘야만족’ 청나라에 멸망하자 조선은 명나라 대신에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해내겠다고 자임했다. 국가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우는 일이 물론 중요하다. 현대 한국이 문화적, 지적 역량을 높인다면 길은 훨씬 분명해진다. 한류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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