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피격 사건은 북한 체제가 크게 오작동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심야의 평양 열병식은 ‘빅브러더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고 북한이 동독식 붕괴 과정을 되풀이할 것 같지 않다. 점진적 변화를 통한 남북 간 상호협력도 꿈같은 미래의 일로 여겨진다. 어쩌면 현 상황은 한심한 ‘현상 유지 또는 퇴보’에 가까울 수 있다.
백기철 ㅣ 편집인지난달 발생한 서해 연평도 공무원 피격 사건에 이어 지난 주말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앞세운 열병식까지 굵직굵직한 북한 관련 뉴스가 이어졌다. 대체로 절망적이거나 기이한 소식들이지만 실낱같은 희망의 여지도 없진 않다.서해상에서 북한군이 우리 공무원을 총격 살해한 사건은 절망에 가깝다. 아무리 코로나 상황이 위중하더라도 해상에서 부유물에 의지해 표류 중인 남쪽 민간인을 6시간 동안 신병을 확보하고서도 조직적으로 사살했다는 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처사다.<1991―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에서 마이클 돕스는 1983년 소련의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을 두고 이렇게 적었다. “수십년간 자발적 고립으로 곁길로 새게 한 체제, 반대 의견을 억누르고 새로운 도전을 유연하게 다룰 능력이 없는 체제, 상식보다 이념을 중시하는 체제의 총체적 우둔함을 보여줬다.”
10일 열린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경축 열병식에 참석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가운데)과 리병철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오른쪽), 박정천 군 총참모장(왼쪽)이 환하게 웃고 있다.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10일 열린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경축 열병식에 참석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가운데)과 리병철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오른쪽), 박정천 군 총참모장(왼쪽)이 환하게 웃고 있다.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공무원 피격 사건은 대한항공기 사건과는 매우 다르지만 북한 체제가 크게 오작동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갖기에 충분하다. 이 사건은 북한이 아직 전근대적 폐쇄사회이고, 이념이나 체제 앞에선 사람 목숨조차 가벼이 여기는 야만 상태에 놓여 있다는 걸 보여준다.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사흘 만에 “대단히 미안하다”고 발 빠르게 사과한 것은 다행이다. 불미스러운 일만 생기면 막무가내였던 그간 북한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사건에 대한 북한 설명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이긴 하다.지난 주말 심야의 평양 열병식은 기이했다. 자정에 수많은 인파가 모여 불꽃놀이 속에서 군사퍼레이드를 벌이는 건 이른바 ‘빅브러더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신형 미사일로 무력 증강에 골몰한 흔적을 내보인 건 위험해 보인다. 김 위원장이 “북과 남이 손을 마주잡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고 덕담한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절망적이거나 기이한 뉴스들이 이어지지만 그 와중에 젊은 지도자는 조금 달라 보이려 하고 있는 게 요즘 북한 모습이다. 그게 정말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독일의 북한 전문가 뤼디거 프랑크는 <북한―전체주의 국가의 내부관점>에서 남북한과 독일은 여러 면에서 다르다며 독일식 흡수통일 가능성을 낮게 봤다. 예를 들어 1987년 한해에만 동독 주민 130만명이 서독을 방문했고 동독의 대다수 주민이 서독 방송을 시청한 반면 남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북한의 주요 파트너인 중국은 떠오르는 강대국이지만 과거 동독을 위성국가로 거느린 소련은 경제적으로 망해가는 나라였다.뤼디거 프랑크는 김정은이 ‘덩샤오핑과 박정희를 섞은 모습’으로 정상에 남은 채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남한과 점진적으로 통일되는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성장이 한계에 부닥친 남한에 이는 엄청난 이익인 만큼 “대담한 정치·경제적 자본을 투입해야 한다”고 했다.현재로선 북한이 동독식 붕괴 과정을 되풀이할 것 같지 않다. 지난 30년 동안 온통 그 가능성에 주목했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점진적 변화를 통한 상호협력도 꿈같은 미래의 일로 여겨진다. 어쩌면 현 상황은 북핵 문제와 맞물려 한심한 ‘현상 유지 또는 퇴보’에 가까울 수 있다.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다. 현실에 닥친 일부터 명료하게 해결하면서 미래의 전망을 열어가야 한다. 당장 공무원 피격 사건부터 현명하게 대응해야 한다. 유족들의 원통함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그렇다고 이 사건을 무슨 세월호 대하듯 할 일은 아니다. 야당과 보수 언론은 문제의 6시간 동안 정부가 뭘 했냐고 따지지만 여러 정황상 정부가 손쓰기 어려웠다는 점은 분명하다.사건의 무게에 걸맞은 해법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김 위원장의 대응이 관건이다. ‘대단히 미안하다’고 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조처를 내놓아야 한다. 진상을 공개하고 합당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 그게 “북과 남이 손을 마주잡는 날”로 가는 지름길이다.문재인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언급한 것을 두고 야당이 비아냥거릴 일도 아니다. 사건은 사건대로 해법을 찾되, 남북이 마냥 이대로 있을 순 없다. 미국 대선 이후 있을지도 모를 평화 교섭은 아마도 문 대통령이나 김 위원장에게는 다시 오지 않을 절체절명의 기회일 수 있다.뤼디거 프랑크는 “한국이 워싱턴, 베이징, 평양에서 긍정적인 발걸음이 나오도록 기다리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며 괴테의 말을 인용해 ‘모루가 되지 않으려면 망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김 위원장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