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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칼럼-이하경 중앙일보 주필] 대통령은 왜 억만무려의 모욕을 헤아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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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77회 작성일 2022-06-27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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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퍼펙트 스톰의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다. 초대형 복합 위기에 직면한 윤석열 대통령은 “경제가 매우 어렵다”고 토로했다. 경제 수장은 “비상” “선제 대응”을 외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부도 직전의 나라를 지켜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리더십을 생각한다.

고백하자면 그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진보인 김대중은 나라 밖에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반공국가 한국의 독재정권에는 감당할 수 없는 불온한 반체제 인사였다. 조작된 내란음모죄, 사형선고, 미국 체류 끝에 1985년 2월에 귀국해 서울 동교동 자택에 연금됐을 때 필자는 야당 출입기자로 그를 취재했다.

퍼펙트 스톰…싸울 이유·여유 없어
야당과 수시로 만나 대화 나누고
김건희 여사 소록도 봉사 고려를
위기 극복의 기적 저절로 오지 않아

권력기관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밤낮으로 감시했다. 김대중은 FM방송을 틀어 감시자의 도청을 저지했다. 체념하기에 딱 알맞은 상황이었지만 경제·노동·복지와 통일·외교·안보 정책을 파고들었다. 전 세계 정치인·지식인·언론인과 대화하고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런 그가 1997년 12월 18일 대통령선거에서 기적처럼 당선됐을 때 기다린 것은 외환위기였다. 경제 전문가들은 “당선인의 첫 발언에 한국의 운명이 달렸다”고 했다. 그는 “국민의 화해와 통합”을 호소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 발전시키겠다”고 했다. 절제된 지도자의 언어였다. 전 세계가 환영하고 안도했다. 대선 때 적이었던 이헌재·임창렬이 스스로 찾아와서 도왔다.

김 당선인이 금 모으기를 제안하자 김수환 추기경은 취임 때 받은 십자가를 주저없이 내놓았다. 1998년 6월 미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만찬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우리는 오늘 이 순간 모두 한국인이 됐습니다”라고 했다. 신(神)은 백척간두의 경제 위기에 준비된 대통령으로 사용하기 위해 김대중에게 세 번의 대통령선거 낙선과 6년의 투옥,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겪게 했던 것은 아닐까.

외환위기가 아시아 금융의 위기였다면 지금의 퍼펙트 스톰은 세계 경제의 금융과 실물을 동시에 강타하고 있다. 흔들리지 않는 리더십이 필요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준비된 대통령이 아니다. 국민을 하나로 만들어 대응하기 위해선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감동을 끌어내는 소통이 중요하다. 소통의 핵심은 언어다. 윤 대통령이 검사로서 평생 상대해 온 피의자들은 겁먹은 약자였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래서 “대통령을 처음 해봐서…”라는 의도하지 않은 거친 언사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검사가 아니고 국민은 피의자가 아니다. 시련 속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성공시킨 대한민국 국민은 꾹 참지만 한번 폭발하면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탄핵시킨 주체다. 고정 지지층이 없었던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광우병 괴담과 촛불시위로 휘청했다. 억울했겠지만 소통 부족의 결과였다. 비슷한 취약성을 안고 있는 윤 대통령은 긴장해야 한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1889~1976)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김수영(1921~1968) 시인은 6·25전쟁 때 북한 의용군으로 끌려갔고, 반공포로가 되면서 아내가 친구와 살림을 차리는 아픔을 겪었다. 배신했던 아내와 재결합하는 혼돈의 정점에서 시인을 지켜준 것은 하이데거였다.

김수영은 시(詩)라는 언어를 통해 존재의 집을 구축했다. 온전히 나로 살았고, 억만무려(億萬無慮)의 모욕을 참아냈다. 시인의 아픔은 식민지와 분단, 전쟁과 군사독재의 강을 건너야 했던 이 땅의 모든 영혼이 예외없이 겪었던 부당한 형벌이었다. 대통령은 무도한 폭력과 광기어린 이념이 퍼붓는 억만 개의 모욕을 묵묵히 감당해 온 국민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가. 그렇다면 예수가 되고, 부처가 돼 천심(天心)을 얻을 수 있다. 하이데거식으로 사유한 김수영의 언어로 “죽음이라는 전제를 놓지 않고서는 온전한 형상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생명만을 사랑하고 싶다”(『나의 연애시』 1968)고 선언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선거의 승자다. 더 이상 누구와도 싸우고 경쟁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 공멸을 막기 위해 극도로 절제된 언어를 통해 연대하고 협력해야 한다. 모든 타자(他者)를 저 우주보다 존엄한 생명체로 보고 연민하는 마음이 있으면 가능하다. 야당도, 반대자도, 국민도 손을 내밀 것이다. 어떤 스테레오 타입도 거부하고 오직 윤석열만의 윤리적 단독성(singularity), 정직과 선의를 추구하기 바란다.

윤 대통령은 사람과 만나 밥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적인 천성을 가졌다. 이왕이면 야당 사람들을 수시로 만났으면 한다. 김건희 여사도 다선의원 부인 모임의 제안대로 한센인들이 모여 사는 소록도를 찾아갔으면 한다. 지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하시는 신을 만날 것이다. 대통령은 때론 내 생각을 몰라줘서 야속하더라도 하늘 같은 국민의 뜻에 승복해야 한다. 대통령다운(presidential) 경지에 도달하고, 국민과 하나 되는 길이다. 퍼펙트 스톰을 잘 견뎌내는 기적은 절대로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

원문보기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82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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